나에게 기적이 여러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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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탈북해 남한에 사는 북한주민은 자신에게 일어난 기적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탈북과정에서 사선을 넘을 때 그리고 험난한 제3국을 경유해 한국에 도착하기까지 크고 작은 놀라운 일들을 경험합니다. 오늘은 함경남도 단천시가 고향인 김영실 씨가 말하는 나에게 일어난 기적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김영실: 저는 1998년에 두만강을 건넜어요. 중국에서 5년 6개월 살다가 한국에 왔어요.

많은 탈북자가 그렇듯 김 씨는 북한에서 아사자가 대거 발생하던 고난의 행군때 탈북합니다. 그때가 김 씨의 나이 20대 후반이었는데요. 몇 년을 중국에서 살다가 다시 안전한 곳을 찾아 길을 떠나며 일이 벌어집니다.

김영실: 2004년에 중국에서 임신해서 한국에 오는 길에 캄보디아에서 애를 낳았어요. 제가 넘어 오는 과정이 너무 기구한데 이제는 웃으면서 얘기를 하지만 중국에서 한국오는 길에 베트남을 경유해 오는데 캄보디아에서 애를 낳았어요.

남한행을 하는 길에서 아이를 낳았다는 것은 이미 출산일이 가까운 시점에서 움직였다는 말인데요? 도대체 무슨 사연으로 길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인지?

김영실: 중국에서 남편을 떠난 것은 이북사람은 잡아오라는 김정일 지시가 있으니까 계속 잡으러 와서 살겠다고 임신 8개월인데 길을 떠났어요. 중국에서 베트남까지 5시간을 걸었어요. 산을 지나 강을 건너 얼마나 험난한 길을 걸었는지 그렇게 베트남까지 오니까 임신 9개월이 됐는데 거기서 애를 못낳고 또 5시간을 걸어서 캄보디아에 가서는 애를 낳고 1년채 안돼서 한국으로 떠나 온 것이 2004년 10월입니다.

1998년 고향을 떠났을 때는 중국에 잠시 건너가 돈을 벌어 돌아온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고 중국남편과 살게 됐는데요. 거기서도 맘 편히 있을 수가 없었기에 무거운 몸을 끌고 제3국행을 했던 겁니다. 계속 있다가는 언제 북송 당할 지 불안해서 더 이상 살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험한 길에서 또 한 번의 기적을 경험합니다.

김영실: 한국오는 길에 캄보디아 길에서 친동생을 만났어요. 이북에서 친동생을 잃어버렸는데 1998년에 헤어졌으니까 6년만에 만난거죠. 저는 기적이 있다고 믿어요. 그래서 저는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어요.

기적이란 상식을 벗어난 놀라운 일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어떻게 6년동안 생사도 알수 없었던 동생을 캄보디아란 낯선 나라에서 그것도 한국행을 하는 길에 만날 수 있었을까요? 서로 약속을 하고 언제 어디서 만나자 해도 길이 엇갈릴 수 있는데 말입니다. 놀라운 일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남한에 도착한 자매는 후에 북에서 헤어졌던 언니하고도 재회를 했습니다. 다시 만난 것이 감사한 일이지만 애초에 생이별 하는 불행한 일은 없었어야죠.

김영실: 그렇죠. 부모님이 세상 떠나셨는데 두 분이 살아계셨다면 고향은 안 떠났거나 아니면 함께 왔을지도 모르죠. 그때는 부모님 돌아가시고 나니 형제도 남남이예요. 자기 살기 바쁘니까요. 그때는 그런 상황이었죠.

남한에 도착했을 때는 아이가 한살 때였고 참 앞날이 막막했습니다.

김영실: 정부에서 주는 집에서 살고 있다가 애를 혼자 키우는 것이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신랑을 데려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해 중국에 있는 신랑을 국제결혼으로 데려왔어요.

기자: 혼자 간난아이를 돌보는 것도 사실 벅찬데 생활비까지 걱정을 해야 하니 정말 힘드셨겠어요.

김영실: 주민센터에서는 일을 하면 수급자에서 제외하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애를 데리고 도저히 일을 못할 것 같아서 남편을 불러야겠다고 생각했죠. 저는 북한에서도 누구 도움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정부 도움없이 남편을 불러야겠다 했는데 그때 정부에서 외국에 있는 남편을 데려올 수 있게 했어요. 그래서 비행기표를 사거 보냈어요. 남편 오고는 그 법이 없어졌어요. 남편 오고는 애를 어린이 집에 맡기고 그때부터는 앞만 보고 달려온 것 같아요.

기자: 보통 사람에게는 한 번 일어나기 힘든 기적같은 일을 김영실 씨는 여러번 경험하셨네요.

김영실: 저는 너무 기적이라고 말하기는 벅차고요. 너무 복받은 사람이예요. 길에서 형제를 만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거든요. 지금은 형제들이 다 한국에 왔어요. 너무 행복해요.

중국에서 온 남편과 함께 둘이서 열심히 돈을 벌기 시작합니다.

김영실: 애를 어린이 집을 맡기고 둘이 14년 됐는데 맡겨놓고 식당일부터 시작했어요. 그렇게 열심히 일해서 7년만에 조그만 집을 샀어요.

정착초기에는 시간제 노동일은 안해본 것이 없을 정도로 여러가지 일을 했습니다. 보통 여성들이 많이 하는 식당일도 했고 조립과 같은 단순 노동일을 하는 회사도 다녔습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김영실: 여기서는 애가 있으니까 정식 일을 못해요 애가 아프면 집에 오고 해야 하니까요. 13살까지는 그렇게 하다가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은 것이 그 뒤에요. 지금은 아파트 청소 미화원을 하고 있어요. 아이를 키우려면 낮에만 일하는 일을 해야 하니까요.

현재 김 씨는 아파트 환경미화원으로 일합니다. 어떤 일인지 들어보시죠.

김영실: 아파트 청소일인데 복도 청소 하고 2012년부터 했는데 사람들이 하찮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긍지가 있어요. 왜냐하면 내몸을 움직일 수 있잖아요. 육제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게 보람이 있어요.

기자: 몇 분이나 같이 하시는 겁니까?

김영실: 혼자해요. 그렇게는 힘들지 않아요. 내 계획을 짜서 하니까 그렇게 힘들지도 않고 여유가 있고

기자: 청소하시는 건물은 몇층짜리인가요?

김영실: 15층 이예요. 괜찮아요

기자: 아침부터 일끝날 때까지 청소를 하는 겁니까?

김영실: 아침부터 쭉 돌아요. 왜냐하면 광고지가 붙어 있어요. 그것을 띠어야 하니까요. 오전에 그걸 하고 오후엔 또 청소를 하니까 힘들지는 않아요.

아픈 과거는 다 잊고 앞만보고 살아간다는 김영실 씨. 열심히 살기 때문에 누구 앞에서든 주눅들지 않고 어깨를 당당하게 펼수 있는데요. 김 씨 주변에는 그렇게 소신껏 생활하는 탈북자분이 대부분이랍니다.

김영실: 많아요. 제가 한국에 와서 살아보니까 한국분들도 열심히 살지만 북에서 온 사람은 보면 존경스런 사람이 많아요. 나이도 있는데 열심히 사는 것을 보면 제가 생각해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니까요.

앞으로도 그냥 지금처럼 쭉 가겠다고 말하는 김 씨. 앞으로 어떤 일이 닥쳐올지 모르지만 지금처럼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랍니다.

김영실: 저하고 신랑은 일만 하다보니까 몰랐어요. 그런데 아이들이 쉬는 날이면 저희들 데리고 영화보러 가거든요. 산도 다니고 가까운 바닷가도 다니고요. 지금 내가 생활하는 것이 마냥 즐겁고 행복하다고 봐요. 빚 안지고 가족이 건강하고 화목하게 사는 게 행복이죠.

제2의 고향 오늘은 함경남도 단천시가 고향인 김영실 씨의 이야기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