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옷차림을 잘하고 외출을 하면 왠지 대접을 받는 기분입니다. 물론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해선 안되지만 실제 그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 현실입니다. 오늘은 낡은 옷도 새것처럼 수선을 해주는 남한생활 12년차 엘레강스 의상실 사장 박미경(가명)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박미경: 자유아시아 방송 계속 많이 들었어요.
기자: 북한에서 RFA방송을 들으셨다고요?
박미경: 아니요. 여기 와서요.
박 씨의 남편은 북한에서도 외부 라디오 방송에 관심이 많아 자주 들었지만 자신은 그럴 필요를 별로 느끼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같이 사람들을 만나 보고 듣는 것이 새로운 정보였으니까요.
박미경: 저는 북한에 있을 때 국경 장사를 많이 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중국 사람을 많이 만났고 중국 사람들을 많이 대상하다 보니까 중국은 물론 한국이 좋다는 것을 그분들을 통해 알게 됐잖아요. 항상 남한에 가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결심 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고 2007년에 기회가 만들어져서 무작정 떠났어요. 바로 태국 들어갔다가 3개월 거기서 대기하다 한국 들어왔어요.
함흥 출신의 박 씨는 북한 식으로 말하면 달리기나 행방을 통해 먹고 사는 걱정은 없었습니다. 남한 사람들은 달리기라고 하면 육상 종목의 달리기를 연상하실 텐데요. 북한에서는 장마당에 물건을 공급하는 도매상을 달리기 장사꾼이라고 하죠.
박미경: 큰 장사를 하다 보니까 남들보다 좀 잘살았어요. 먹고 사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는데 남들과 만나다 보니까 제가 식견이 좀 높아졌죠. 여기서는 아무리 내가 잘 먹고 잘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구나. 내가 가야겠다 하는 생각을 했죠.
박 씨는 탈북해서 바로 남한으로 직행합니다. 그리고 다른 탈북자들처럼 사회적응교육 시설인 하나원을 거쳐 아파트를 받았는데요. 이제는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었지만 당시엔 고민이 참 많았습니다.
박미경: 처음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내집 이라고 들어왔을 때는 밥가마(밥솥)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것을 봤을 때 억장이 확 무너지더라고요. 북한에서는 살만큼 살았는데 내가 원해서 왔지만 이제부터 시작이구나 빈손으로 시작이구나 했을 때 잠도 안 오고 내가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죠. 그래서 일찍 일을 시작했는데 지금 오시는 분들에게 처음부터 돈을 벌겠다고 힘들게 무리하지 말라고 말해줘요. 차분하게 학원도 다니고 여러 사람도 만나고 한국을 어느 정도 안 다음에 일을 시작하라고 해요. 일자리는 많잖아요. 돈을 버는 것은 내가 준비가 되면 돈은 따라오니까 몸을 상하지 말라고 말해요.
마음 같아서는 일한만큼 돈을 벌 수 있으니 몸이 여러 개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고 쉬지 않고 계속 해서 금방 큰 돈을 벌 수 있겠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천만에 말씀입니다. 박 씨는 하나원에서 나와서 바로 일을 시작했는데요. 북한에서부터 했던 일이라 자신 있게 문을 두드립니다.
박미경: 처음에는 옷 공장에 가서 일했어요. 나는 자신 있다고 갔는데 기계를 보니까 자동이잖아요. 그 기계를 보는 순간에 위압감을 느끼면서 자신감이 떨어지더라고요. 그런데 솜씨는 다른 사람이 저한테 당하지 못하죠. 하루 이틀 하고는 금방 기계에 적응을 하고 백공 일이라고 내가 일한만큼 돈을 가져가는데 백공일을 해서 일주일에 80만원씩 받았어요. 하루에 옷을 아래 위 40벌을 만들었어요.
기자: 일하는 시간은 어떻게 됐는데요?
박미경: 시간이 아침 9시 출근하면 일 끝나고 집에 들어오면 밤 11시 반이에요. 한 5시간 자고 또 일가는 거예요. 점심 시간은 1시간 인데 백공은 월급제가 아니고 북한에서 도급제처럼 내가 한 것만큼 버는 거니까 사람이 죽기 살기로 하는 거예요.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다른 백공 분들도요.
매주 목요일 80만원 받았습니다. 한 달이면 320만원 미화로 하면 대략 3000천 달라가 됩니다. 하지만 3개월을 버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생각한 것이 옷 만드는 기술도 있으니까 조용하게 혼자 의상실을 차려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옷 도매상을 돌아다니면서 시장조사를 몇 달 하게 됩니다. 하지만 옷 만드는 것보다 수선을 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말을 듣게 되죠.
박미경: 북한에는 옷을 수선해 입는 다는 것을 몰라요. 그냥 옷 하나 샀으면 구멍 날 때까지 입다가 자기가 꼬매 입는 것은 있지만 전문적으로 수선해 주는 것은 없고요. 저 자체가 한국에 왔을 때 수선 일이 생소하고 그래서 시장조사를 해보니까 옛날에는 맞춤옷을 많이 해 입었는데 요즘은 백화점까지도 옷이 싸서 의상실이 안되니까 차라리 옷 수선을 하라고 어떤 분이 가르쳐 줬어요.
일단 현장에 있는 사람 말을 들어야 해서 옷 수선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요. 박 씨는 그날로 구인광고를 보고 백화점 옷 수선실을 찾아갑니다.
박미경: 젊은 사람이 양장양복을 한다는 말을 듣고는 믿지를 않더라고요. 한국에는 양장양복을 하는 사람이 다 60대 이상이에요. 젊은 사람은 디자이너 빼고는 안 한다는 거예요. 처음에는 잘 믿지를 않아서 내가 한 번 시켜보라고 했더니 여자 윗도리 소매를 뜯어서는 다시 붙여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배운 데로 하니까 그 사장님이 깜짝 놀라면서 북한 사람들이 이렇게 일을 잘하냐고 하더라고요. 거기서 한 3년 일하고 제가 독립한 것은 2014년부터 혼자 해요.
엘라강스 수선실, 맞춤의상 수선 다 합니다라는 간판을 내걸고 6년째 일하고 있는데요. 박 씨는 그 동안 일하면서 느낀 것이 한국 부자들은 옷을 안 사 입고 좋은 옷을 한 벌 구입하면 오래 입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닳거나 유행이 바뀌면 고쳐 입는다는 건데요.
기자: 돈 많은 부자가 뭐가 아쉬워서 오래된 옷을 입는다는 말입니까?
박미경: 아니에요. 명품은 낡을수록 멋져요. 그것은 명품을 입는 사람들이 아마 다 저처럼 그렇게 말할 거예요. 옷이 명품이라고 하면 낡아도 멋스럽고 오래 입어서 닳아서 헤지면 제가 헤진 부분은 천을 색깔 맞춰서 누벼주면 몰라요. 그러면 사람 몸에도 잘 맞고 착용감이 입던 거라 더 좋다는 거예요.
한국에 온 것은 잘한 선택이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이겁니다.
박미경: 북한에서 장사를 18년 했는데 작은 체구로 장사를 가는 순간부터 집에 다시 돌아오는 순간까지 길에서 보내는 거예요. 숙식도 길에서 하면서 내가 1만원을 들여서 7천원을 벌었다면 5천원은 단속원들에게 줘야 하니까 내 손에 차려지는 것은 별로 없는데 여기는 몸은 피곤하게 일했지만 내가 일한 것만큼 대가를 그대로 받잖아요. 두 번째 좋은 것이 한국에 오니까 자다가도 내일 부산에 가야겠다 하면 차로 바로 갈 수 있으니까 너무 좋은 거예요. 세 번째 좋은 것이 내가 여행 갈 거야 하면 바로 비행기 타고 외국 갈 수 있잖아요.
1년에 두 번은 신랑하고 무조건 여행을 간다는 박 씨. 생활환경은 좋아졌는데 그래도 마음 한구석이 답답한 것은 어쩔 수 없는가 봅니다.
박미경: 그냥 단지 슬프고 괴롭고 힘든 때는 부모, 형제 못보고 내 자식 못 볼 때는 가슴이 꽉 막히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머리도 아프고 하니까 여행가서 머리 좀 식히고 푹 쉬고 오자 하고 가면 우리 가족이 여기 있었으면 이 좋은 것 같이 먹을 텐데 이런 생각이 또 스쳐 지나가고 해서 힘들었지 다른 것은 힘들었던 것이 하나도 없어요. 내가 노력한 것만큼 대가가 주어지는 데 뭐가 힘들어요.
제2의 고향 오늘은 옷 수선실 겸 의상실을 운영하는 박미경(가명)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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