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농사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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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번잡한 도시 생활을 뒤로 하고 농촌에 가서는 농사를 짓고 있는 탈북여성이 있습니다. 북한에서와 달리 작물재배는 영농기계를 사용해서 많이 수월한데요. 현대화된 농법으로 통일시대를 준비하는 여성이 있어 소개합니다. 오늘은 평안남도 평성시 출신의 장귀화(가명)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장귀화: 제가 땅을 2천4백평을 빌려서 고구마 작물을 심었어요. 강화가 고구마가 유명하거든요.

통일부에 따르면 남한에 사는 탈북자 수는 현재 3만 2천여명이 됩니다. 그런데 탈북자가 농사에 대한 행복한 기억있다면서 기자에게 말하는 경우는 접하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농사일은 어찌보면 피하고 싶은 직업인데요. 장 씨는 도심에 집을 받았는데 그것을 처분하고 현재 지방에서 농장을 하고 있습니다. 남한생활이 10년이 돼가는 장 씨의 사연 좀 자세히 들어보겠습니다.

기자: 자기 땅을 갖고 시골에 산다는 말입니까?

장귀화: 내땅은 없는데 여기서 임대로 살아요. 한국이 좋은 것이 땅도 집처럼 임대를 받을 수 있더라고요. 그래서 임대를 받아서 농사 짓고 있어요.

기자: 농사는 뭘 하시는데요.

장귀화: 고구마 작물을 심었어요. 같이 오신분들의 귀농귀촌 센터를 만들고 싶어서 지금 준비를 하고 있어요.

기자: 작물은 고구마만 심으십니까?

장귀화: 처음에는 여러가지를 했는데 나중에 통일 되면 북한에 논보다는 밭이 많으니까 뭔가 통일 된 상황에서 서로 나눌 수 있는 것을 해야겠다 해서 농사를 배우고 나중에 협력하려고 탈북민 귀농귀촌 체험센터 이것을 준비하고 있어요.

지난 1999년 탈북해 중국생활을 거쳐 남한에 간 장 씨는 북한에서는 선전대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남한에 가서 탈북인들로 구성된 북한예술단을 꾸려 공연활동을 했는데요. 현재는 이렇게 농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만족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장귀화: 솔직히 남한에 와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란 것이 내가 식당 김밥집에서 알바를 했는데 내가 내 힘으로 힘껏 버는 돈이 전부 내것이 되는 구나 하는 것이 행복했어요. 북한은 내가 일을 얼마를 하든 나라에 받치고, 주면 받고 안주면 없잖아요. 지금은 나만 열심히 살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행복해요.

남한에 가서 다양한 일을 해보고 내린 결론입니다. 어떤 일들을 해봤을까요?

장귀화: 김밥집 알바를 해봤어요. 주말에는 교회에서 주문을 해서 몇천개씩 말거든요. 그리고 북한식으로 말하면 계란 파는 곳에서도 일했고 식품회사에서 돼지족을 자르고 포장하는 일도 해봤어요. 일은 배우는 입장에서 힘들 수도 있었지만 그때는 단체를 만들어 활동을 해서 고정 직장은 다닐수 없었어요. 하지만 짬짬이 알바를 하면서도 북한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죠. 북한에서는 일하면서도 숨기고 감추고 하면서 번돈이 내것이지만 나라에서는 많은 돈을 내가 벌었다고 주진 않았잖아요. 그런데 이나라 자유가 좋다는 것이 내가 힘들여 번 것이 내 재산이 되는 것이 좋더라고요.

기자: 살면서 힘든 점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장귀화: 솔직히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호기심 때문에 물어보는데 이런 분들은 크게 보면 색안경을 끼고 물어보는 사람 그리고 너희는 못사는 나라에서 왔으니 당연히 모를 것이다 하는 성향을 가지고 물어보는 사람이예요. 저는 솔직히 말해도 처음에는 북한의 독재란 것을 상상을 못하니까 믿지를 않더라고요. 최근에 와서는 남한분들도 많이 달라져서 우리가 말하면 긍정적으로 대하는데 처음에는 힘들었어요. 또 어떤 분들은 너희가 탈북해 오긴 왔지만 언젠가는 빨갱이 사상이 있어서 어떻게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부담스러웠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졌어요.

10년 세월이면 강산의 못습도 변한다고 했습니다. 항상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습이 눈으로 확인이 되는데요. 지금 생각하면 남한생활을 막 시작했을 당시 자신의 행동이 정말 옛말처럼 들립니다.

장귀화: 웃기는 소리지만 북한은 우측통행이었어요. 그런데 남한은 좌측통행이더라고요. 실수해서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문화차이를 느꼈고 그 다음 실수한 것은 저희는 북한에서 음성이 높아요. 그런데 지하철을 탈 때 모르니까 물어봐야 하는데 우리식으로 그냥 소릴치고 지하철 안에서도 소리를 치면서 서로 찾고 부르고 하니까 한국분들이 놀라서 저희를 쳐다보고 한 것이 챙피도 하고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도 하고요. 또 학원에 가서 공부를 하는데 이해를 못해 괜히 화도 내고 어울리지도 못하고 사람들과의 소통 문제도 엄청 챙피한 일도 많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독재자 밑에서 한사람을 섬기면서 숨죽이고 살았고 충성심 하나라 살았던 것이 자유세상에 와서는 챙피한 일이구나 하는 것을 알았죠. 뒤돌아 보면 우리가 너무 어리석게 살았다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되죠.

기자: 지금은 어떠세요.

장귀화: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 세월이 약이라고 저도 한국에 적응이 돼서 그런지 이제는 들을 것은 듣고 걸러서 받아들이는 지혜가 생긴 것같아요. 선거 때는 정말 싫더라고요. 당장 나라가 뒤집히는 것같고 너무 무서웠는데 지금은 많이 적응이 됐어요.

지난 10년 세월 정착과정에 여러 시행착오도 있었습니다. 언제나 원하면 듣고 볼 수 있는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 그리고 각종 신문과 잡지 등의 인쇄매채를 통해 정보를 넘치도록 접했습니다. 그래서 거짓정보와 진실을 가려내는데 선택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는데요. 이런 것은 세월이 흐르며 어느정도 해결이 됐다는 겁니다. 이제는 자신이 원하는 길을 정했으니 꿋꿋하게 살겠다는 결심입니다.

장귀화: 솔직히 입국 당시에는 꿈이 많았는데 흘러가는 세월속에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면 내가 설자리를 찾아서 해야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 했죠. 도시에서 할 수 있는 것 발전된 이 나라에 이바지 하는 것이 좀 힘드니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농사일을 배워서 해야 겠다 생각을 했어요. 요즘 농촌에는 젋은 사람이 없잖아요. 누가 알아주지는 않아도 화려한 꿈을 쫓지 않고 조금이라도 나라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농사를 하려고요. 이제는 농사도 옛날처럼 하지 않고 현대식으로 하잖아요. 이런 것을 많은 사람이 체험하고 탈북자들에게 경험을 주자 해서 그런 역할을 하고 싶어요. 시작이 절반이라고 배워 가면서 나도 노력하면서 살고 싶어요.

제2의 고향 오늘은 장귀화(가명)씨의 이야기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