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주인공은 바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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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나는 내인생의 개척자. 이 말은 너무도 당연한 것 같지만 북한 사회에서는 용납이 안 되는 말인가 봅니다. 간호사로 군을 제대해 사회생활을 하던 한 탈북여성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 신념과 의지를 가지고 고향을 떠났다고 말합니다. 오늘은 최수향(가명) 씨의 남한생활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최수향: 북한을 나오게 된 계기는 군생활 마치고 사회생활 하는데 대학을 가려면 돈이 없으면 못가겠더라고요.

북한주민은 공감할지 몰라도 외부세계 사람들은 무슨 말인가 하고 의아해 할 겁니다. 북한은 무상교육, 무상의료제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물론 경제상황이 나쁘다고 하지만 그래도 최고 엘리트 교육을 하는 담당하는 대학은 토대(출신성분)를 따지고 또 추천이 있어야 갈 수 있다는 것으로 알기 때문에 어리둥절 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자: 북한에선 무상 아닌가요? 등록금을 내야 합니까?

최수향: 등록금은 따로 없어요. 저도 그렇게 알고 사회생활을 시작했었거든요. 군에서 제대하면서 대학교 추천서을 받아서 공부하려고 보니까 등록금이라고 따로 정해진 것은 없는데 북한 사정이 국가에서 학교에 보장하는 게 없잖아요. 학교에서 필요한 것을 학생에게 개별 부담을 시키는 거예요. 교복도 단체복으로 입으라고 하는데 교복도 자체로 만들어 입어야 하고 모든 것이 자비로 해결해야 하더라고요.

군생활 하면서 사회에 나가면 뭘하겠다 하고 계획했던 일이 한순간 틀어지게 되고 일단은 앞에 차려진 일을 하게 됩니다. 점차 불안한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뭔가 선택을 해야만 하는 상황까지 이릅니다.

최수향: 돈이 없어서 학교를 못갔고 장사를 하는 과정에 조금 생각이 바뀐 거죠. 북한에서 내가 과연 공부를 해서 행복해질 수 있을지 공부를 하고 나서도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하고 싶은 전공을 선택할 수도 없고요. 정말 탈북하게 된 이유 중 하나도 사회 나와서도 간호사 생활을 했거든요. 돈이 필요하다고 돈만 벌고 살 수는 없어요. 무조건 국가일을 해야하다보니까 사회병원에서 간호사 생활을 했던 거예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월급이 북한 돈으로 1천 700원이었는데 당시 시장에서 쌀 한키로에 4천원에서 5천원 이었어요. 한 달 열심히 병원에서 일해도 쌀 한키로도 못 사는데 어떻게 살아요. 앞날이 안보이는 거예요.

최 씨는 양강도 혜산에서 2014년 12월 중대 결심을 하고 길을 떠납니다. 이것이 최 씨의 탈북배경 입니다.

최수향: 중국 장사를 시작했고 중국에 나와서 중국도 보고 한국 뉴스도 접하고 나서 한국을 알았어요. 한국에 오면 내가 하고 싶은 공부나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할 수 있는 그런 자유가 있으니까 탈북했던 거예요.

북한에서는 간호사로 당원이었다는 최 씨. 먹고 살길이 찾아 생존을 위해 탈북했다는 많은 탈북자와는 사정이 좀 다릅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었고 자신의 인생은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을 원했기 때문에 고향을 떠났다고 했는데요. 좀 더 최 씨를 이해하기 위해 얘기를 들어봅니다.

최수향: 여성은 군생활 6년 입니다. 제가 군생활 할때는 6년이었는데 보통 7년씩 하는 분이 많았고 저 같은 간호사는 6년하고 제대를 하거든요. 저는 간호사여서 만 6년 채우고 제대했어요. 한국은 대학교을 나와야 간호사를 할 수 있더라고요. 그런데 북한은 1년정도 간호사 공부를 하면 일할 수 있거든요. 군생활 6년 공부도 하고 간호사도 했던 거예요. 그리고 사회 나와서 간호사 자격증이 있으니까 그리고 군대 갔다오면 당원이 되니까 당생활을 하면서 사회병원에서 취직을 할 수 있었던 거죠.

기자: 원래는 대학 가려고 했잖아요?

최수향: 네, 그런데 간호사는 자격증이 이미 있으니까 간호 공부하려고 대학을 가려고 했던 것은 아니고 저는 어렸을 때 너무 가난하게 살았어요. 아빠 엄마가 노동자 집안이라서 저는 제가 그렇게 가난하게 산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군생활 하고 북한에서 신분상승을 하기 위해 학력이 있어야 하니까 저는 상업대학을 가고 싶었어요.

탈북해서는 제3국을 거쳐 바로 남한에 입국합니다. 처음부터 남한으로 가는 것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됩니다.

최수향: 일단 한국에 오면 대한국민 국민과 똑 같은 권리가 주워진다는 그 이야기 하나 듣고 탈북한 거예요. 내가 무슨 일을 하든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공감이 되고 그것이 저는 간절해서 왔던 거예요.

낯선 도시에 떨어지고 보면 첫인상이 참 중요합니다. 처음에 만나는 사람이나 눈에 보이는 모습이 좋으면 적응하는데요 수월하고요. 왠만한 불편은 그냥 넘기게 됩니다. 많은 기대를 갖고 찾은 남한땅인데요. 최 씨는 당시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요?

최수향: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쉽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희망은 있었어요. 왜냐하면 저는 집은 기대를 안했고 정착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우리한테 정부적인 지원이 있었서…처음엔 정말 같은 한국말을 쓰는데 이해를 못해서 속상할 때도 많았고 처음에는 경제신문 하나보는데도 외래어가 너무 많아서 혼란스러웠던 시기도 있었지만 잠깐이었던 것 같아요. 지나고 보니까.

탈북자에게는 정착금도 주고 최 씨가 그렇게 원했던 대학공부도 무상으로 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도착했던 남한. 어려움은 있었지만 생각지도 않은 남한정부의 탈북자 지원정책으로 용기를 얻습니다. 그렇게 시작했던 제2의 인생은 최 씨의 나이 24살 때 입니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세상을 본거죠.

최수향: 저는 걸음걸음 다 놀라운 것이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제 몸에 직접 와닿고 좋았던 것은 밤에도 어디를 가도 너무 밝아서 하루 24시간 전기공급이 한순간도 끊기지 않는 다는 것이 놀라웠고 물틀면 항상 수돗물이 나오잖아요. 북한에선 수돗물이 나와도 하루에 30분 정도 나오면 잘나오는 것이었거든요. 그것도 정말 놀라웠어요. 그리고 한국에 차가 정말 많더라고요. 그것도 충격이었어요.

최 씨는 남한에 가서 대학진학을 했습니다. 북한에서의 전문성을 살려 간호대학을 갔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다른 길을 택합니다. 누구의 권유나 강요가 아닌 순전히 자신의 선택으로 말입니다.

최수향: 이유가 제가 북한을 나올 때 목표가 한국와서 돈 벌어 사업해서 잘사는 것이었어요. 간호사는 5년정도 북한에서 해봤잖아요. 북한에서 장사를 하면서 제약이 너무 많았는데 돈을 벌면 내가 돈이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겠구나 이런 생각도 했었구요. 아무튼 돈의 중요성을 너무 일찍 알았어요. 북한에서 장사하는 데 제한이 너무 많아서 나왔고 북한에서 경제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곳이 없잖아요. 배워본 적이 었었는데 한국에서는 배우지 않고는 어디가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잖아요.

남한입국 후 바로 원래대로 학교생활을 했으면 3학년이지만 서두르지 않고 자신의 선택으로 일과 학업을 조율하고 있습니다.

최수향: 지금 대학교 1학년 입니다.

기자: 올해 들어갔네요?

최수향: 원래 한국와서 다음해에 지원해서 2017년에 외대 경영학부에 합격했었는데 그때는 회사를 다니고 있었고 사회적응이 먼저 필요한 것같아서 회사일을 좀더 하다가 올해부터 공부를 시작했어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진정 누리고 사는 최수향 씨. 앞으로는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도 돌아보면서 살고자 합니다.

최수향: 저는 배려하면서 사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북한에서 도움받은 분들 한국에서 정착하면서 도움받은 분들에게 받은 것 못지않게 갚으면서 배려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최수향(가명) 씨의 남한생활 이야기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