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지만 다른 아파트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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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과거는 과연 아름다운가? 일반적으로 보면 지난 일들에 대해선 상당부분 좋게, 아름다운 기억만을 말합니다. 현재나 미래보다는 과거에 대해 관대해지는데요. 세 아이의 엄마였고 친정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이 탈북여성에게는 그 과거가 너무 아파 보입니다. 오늘은 함흥시 성천강 구역에 살았던 박은혜(가명)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박은혜: 요즘은 제가 허리 수술을 한 다음부터는 일을 못하고 집에서 휴식하고 있습니다.

박 씨는 남한생활 8년만에 완전히 일을 손에서 놓고 손자를 보며 소일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버느라 아픈 허리가 아니기에 과거가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박은혜: 협착증 수술을 받았습니다.

기자: 언제부터 아프셨는데요.

박은혜: 1년 반이 지났습니다. 너무 무리해서 그렇겠죠. 북한에 있을 때 20층 아파트에서 14층에 살았어요. 아이 둘을 업고 14층을 하루에도 10번을 오르내려야했거든요. 그때 당시 인민반장을 하면서 많이 오르내렸어요. 그러다보니까 거기서도 좀 무리가 갔고 또 중국에서 13년을 있으면서 북한에 있을 때보다 더 일을 했어요. 산에 매일 다니고 겨울에 나무도 하고 하면서 쇳돌도 캐고 몸을 많이 혹사했죠.

지금은 함께 탈북한 아들 딸이 남한에서 결혼해 아이들을 낳고 자릴 잡았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있다면 매일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마음이라고 하는데요. 그만큼 1997년 압록강을 건널 당시의 심정은 절박했습니다.

박은혜: 무작정 건넜죠. 우리 아들하고 딸을 먼저 넘겼어요. 아들이 당시 15살, 딸이 14살이었어요. 집에는 친정 어머니하고 4살된 막내딸이 있었어요. 하루는 제가 엄마한테 우리 주머니에 있는 돈으로 맛있는 것 사 먹고 그냥 이렇게 죽자 했어요. 엄마가 그소리를 듣더니 무릎을 치면서 울며 애원하는 거예요. 제발 너희는 그러면 안된다. 나는 나이 먹어 죽으면 되지만 너희는 젊어서 살아야할 나이인데 왜그러는가… 중국에 갈 수 있다면 가자. 이러는 거예요. 내가 장사 하러 가려고 준비를 하는 데 막내가 그러는 거예요. 엄마 사탕사러 가나? 물어봐요. 그래 윤희 먹을 사탕사라 간다. 3일 있다가 올께 하고 헤어졌거든요. 그런데 50일 동안을 장삿길에 나갔다가 그냥 내가 꽃제비가 됐으니까 집에도 못올 형편이 됐잖아요. 그렇게 하고 저는 3월7일 중국에 넘어 왔는데 훗날 다시 잡혀갔을 때 소식을 들었어요. 3월 9일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일주일 후에 우리 딸도 굶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북한 청취자 여러분은 고난의 행군시절을 기억하실 겁니다. 당시엔 평민이나 당간부나 정도의 차이는 있었을지 몰라도 모두가 힘든 시절을 보냈다고 탈북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박 씨도 남편이 사고로 사망하고 혼자서 친정어머니와 어린 남매까지 다섯 식구를 책임지는 가장으로 살기위해 발버둥 치던 때였는데요. 배급이 끊기기 전까지는 큰 어려움없이 살았습니다. 얼핏 고층 아파트에 살았다고 해서 기자는 평양에서의 생활을 얘기한 줄 알았을 정도입니다.

박은혜: 아니요. 함흥인데요. 애아빠가 무력부 산하에 있었어요. 금제련소에 있었는데 오진우 무력부 부장이 살아계실 때 금제련소에 특별 배려로 20층 원형 아파트를 지어줬어요. 내가 살 때 우리 아파트만 그랬는데 공기좋은 함흥 중심지에 지었어요.

함흥 성천강 구역에 있는 고층 아파트. 방 한칸짜리 단층에 사는 주민에게는 높은 고층에 사는 이웃이 부러워보일 수 있겠지만 박 씨의 말을 들어보면 그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기자: 20층 아파트에 승강기가 없었나요?

박은혜: 있어도 전기 사정 때문에 탈수가 없고 그냥 무용지물이죠.

기자: 20 층 꼭대기에 사는 사람은 고역이었겠어요.

박은혜: 다 그렇게 걸어다녔어요. 가을철이면 김장도 다 메나르고 물도 없어서 시간제로 하고요. 금방 아파트를 지어서 완공되지 않은 상태라 자체로 꾸렸어요. 바닥에 물이 차는데를 들어가서 공사를 하고 물이 안나와서 믈을 길어 오르고 했어요. 20층 꼭대기 사는 사람도 아래 내려와서 물동이로 물을 지어 나르고 했어요.

기자: 화장실은요?

박은혜: 화장실은 집에 있는데 물을 길어다가 부어야 하고요. 하루 열번을 길어 날라도 안돼죠.

박 씨가 들려준 이야기는 1983년 고층아파트에 입주했을 때부터 1997년 압록강을 도강하기 전까지 입니다. 박 씨가 고향집을 떠난 것도 20년이 지났으니 지금은 그 아파트의 모습이 얼마나 변했을까요?

박 씨는 도강해서 중국에 가서는 13년을 살았습니다. 처음 탈북은 먹고 살기 위한 것이었고 중국에서도 다른 생각은 없었답니다. 그런데 지금은 남한에 살고 있습니다.

기자: 남한에 대한 인식이 언제 바뀌던가요?

박은혜: 도강해서 중국에 와서 몇 해를 살다가 산둥쪽에 한국기업에 많은데 그곳 한국식당에서 일하면서 잡지도 보고 하면서 그때 많이 깨달았어요. 그리고 중국교포들이 하는 얘기가 북한에 간 사람들은 빚지고 오고 남한에 간 사람들은 돈 번다는 거죠. 잡지를 보면서 우리가 많이 속아 살았구나 하는 것을 알고 남한에 가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우리가 북한에서 왔다고 하면 잡혀갈까봐 탈북자라는 것을 숨기고 살았어요. 중국교포인척 가장하고 산동에 살았거든요. 그래서 여기 올때까지도 주변사람조차 우리가 북한 사람인 것을 몰랐어요. 그러다보니까 오는 길이 늦었죠.

기자: 중국에서 13년이나 긴 세월을 산 이유는 뭔가요?

박은혜: 그러니까요…우리가 북한에서 왔다는 것을 숨기고 살았기 때문에 남한에 오는 길이 열리기 않았고 알수가 없었던 거예요. 산동에 살면서 아들이 많이 노력했어요. 배를 타고라고 밀항을 하다가 죽더라도 가겠다는 겁니다. 남한정부에 찾아가서 북한에서 왔다고 실토하겠다는 거죠. 꿈속에서도 남한가는 생각을 하고 사니가 어찌 남한가는 길이 열리더라고요.

영양실조에 걸린 어머니와 어린 딸의 마지막 모습도 보지 못했던 아픈 지난날. 박 씨는 추운 겨울 살기 위해 압록강을 건넜고 신변안전이 보장되지 않았던 중국을 떠나 남한에 정착했습니다. 지금도 북한에서 살았던 고층 아파트에 살지만 상황은 전혀 다릅니다. 그리고 이제는 담담히 옛날 이야기처럼 과거를 전하고 있습니다.

박은혜: 저희는 7층입니다. 승강기를 타고 올라가니 1층이나 마찮가지잖아요. 남한 아파트 생활이야 북한에 비하면 중앙당 간부생활이라고 봐야죠. 승강기 타고, 물이 24시간 나오고 말하자면 두말하면 잔소리고요. 너무 행복하니까 뭐라고 말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너무 행복하니까 통일이 돼서 못갈 것 같아요.

제2의 고향 오늘은 함흥시 성천강구역에 살았던 박은혜(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