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탈북자가 남한에 가서 차를 직접 운전하고 다니는 것은 특별한 모습이 아닙니다.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 운전자도 많은데요. 생활의 편리를 위해 운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직업으로 삼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소개할 여성은 현재 서울 시내에서 버스를 몰고 있는데요. 시내버스 운전사가 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탈북여성 임지예(가명) 씨의 사연 전해드립니다.
임지예: 저는 도시에 가서 산다고 했어요. 시골에선 안산다고 했어요. 도시에 가서 물 콸콸 나오는 아파트에 가서 산다고 했어요. 진짜 말이 씨가 됐잖아요. 여기까지 와서 살잖아요.
50대 중반으로 신의주가 고향인 임 씨는 남한에 사는 것을 자신의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임지예: 어릴 때부터 할머니는 말이 씨가 되니까 항상 좋은 생각하고 좋은 말만 하면 그대로 된다고 했는데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니 어렸을 때 원했던 모든 것이 실현이 된거예요.
물론 꿈이 실현되기 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 35년은 북한에서 살았죠.
임지예: 탈북한 것은 1997년에 했어요. 아이들 아빠가 당원이 되고 싶어 했는데 안됐어요. 그리고 도저히 북한에서는 못살겠다고 해서 온가족이 중국으로 탈북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중국에 머물다 2000년에 남한행을 위해 몽골에 들어섰다가 잡혀서 4월 강제북송 됐다가 같은해 10월에 재탈북했어요.
임 씨 가족은 중국에서 강제북송을 당해 온성 보위부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당시는 남북관계에 커다란 변화의 물결이 시작될 때였습니다. 남한의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고 김정일 위원장은 강제북송된 탈북자를 사상교육 시켜서 석방하라는 사면 지시를 내렸던 겁니다. 그래서 임 씨는 감옥에 가지 않았고 구치소에서 3개월만에 석방됩니다.
임지예: 2000년 내가 북송 됐잖아요. 그런데 내 고향에 가니까 사람들 인식이 정부에서는 자유롭게 살게 해줘라 했는데 정작 내 고향땅에 가니까 민족 반역자, 역적이란 꼬리표가 붙어서 사람들에게 눈총받고 어디가서 발붙일때가 없는 거예요.
북한에서의 생활은 탈북전보다 더 힘들어졌습니다. 매일 감시를 받아서 숨막히는 생활을 하게됐고 다시한번 탈출을 결심하게 됩니다.
임지예: 탈북할 당시엔 우리 건너편에 중국이 있다 해서 왔는데 정작 와 보니까 진짜 별나라 같은 세상이었어요. 처음에는 별나라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와서 살다보니까 그래도 고향생각도 나고 했는데 고향에 잡혀가서 보니까 더 암흑같았어요. 이전에 생각했던 이북이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여기서는 더 못살겠다 죽을 먹더라도 중국가서 죽을 먹자해서 재탈북한 거예요.
재탈북에 성공한 후에는 바로 남한으로 가지 못하고 중국 대련에서 3년을 살았습니다. 잠시나마 한 번 경험 했던 중국이었기에 차가많고 높은 건물은 이제 신기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생활할수록 점점 더 힘들어지는 것이 불안한 신분에 대한 걱정이었고 어렵게 2001년 남한에 도착합니다.
임지예: 중국에서 살다가 왔으니까 중국에선 숨통을 죽이고 살았는데 2001년 남한에 오니까 천국이다 이런 것을 떠나서 살것 같은 여기서는 자유롭게 살 수 있구나 하는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태어난 곳은 아니어도 내 조국같이 너무 편안했어요.
당당하게 남한주민으로 신분증을 받아 생활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또다른 걱정이 생겼는데요. 정착금은 탈북비용으로 쓰고 남겨둔 큰아들을 데려오기 위해서는 브로커 비용이 필요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남한정부는 원하는 사람은 학원도 보내주고 대학에서 공부도할 수 있게해줬지만 임 씨는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우선이었습니다.
임지예: 아무리 다 알아봐도 9시부터 5시까지 일할 수 있는 것은 파출부밖에 없어요. 한 달에 버는 돈이 150만인데 그것 가지고 언제 900만원 갚고 아들 데려오는데 1,300만원 들었거든요. 언제 돈을 갚아요. 아침에는 파출부 일을 하고 5시 끝나면 자전거 타고 와서 또 식당 일을 12시까지 했어요. 하루에 보통 16시간을 만 4년 일했어요.
북한이나 중국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입이었지만 물가도 비쌌기 때문에 생각처럼 쉽게 돈이 모이질 않았습니다. 사람이 기계가 아닌 이상 쉬지 않고 일만 할 수는 없는거죠. 임 씨는 북한에서의 직업이 수의사였기에 그와 비슷한 일로 육체노동이 아닌 수입도 좋고 몸을 쓰지 않는 일을 찾게 됩니다.
임지예: 애완미용학원을 다니려고 학원을 등록하려고 갔는데 처음에는 원장이 없다. 두번째는 사람이 다 찼다 그다음에는 정부지원이 안된다. 그래서 다른 길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집에 오는 버스를 탔는데 여자 아줌마가 버스를 운전하더라고요. 그것을 보고는 그래 바로 이거야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자기가 원한다고 해서 바로 시내버스 운전기사 될 수는 없었고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우선은 버스를 몰 수 있는 면허증이 필요했고 대형버스를 몰기 위해 15인승 승합차 운전부터 시작합니다.
임지예: 내가 이길을 선택해야해. 시내버스 운전사가 되자하고 어떻게 하면 버스운전사를 할 수 있는가 물어보니까 운전면허 1종을 따고 마을버스 1년정도 경험이 있으면 된다고 하더라고요. 2종 보통을 딴지 8개월이 돼서 조금 있으면 1종 면허 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이 되고 해서 1년 될 때까지 하던 일을 하고는 1종 대형 면허 시험을 봤어요. 면허를 따고는 오면서 집에 오면서 기분 너무 좋아서 벼룩시장 구인란을 보는 데 학원버스 운전사 모집을 하더라고요. 아침 10시부터 저녁 6시까지 하면서 80만원 주는 것밖에 없더라고요. 바로 전화했더니 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면허증따고 3일만에 학원버스 기사로 들어갔죠.
사실 면허는 땄지만 실제 운전을 안해서 차를 몰고 다닌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남들모르게 혼자 애를 썼습니다.
임지예: 한 달동안은 애를 먹었어요. 그래서 연습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점심 시간에 선생님들이 다 점심 먹고 낮잠 잘 때 나는 몰래 차끌고 나와서 주차연습을 10일동안 했어요. 그래서 완벽하게 운전을 하고는 거기서 학원버스를 7개월 했어요.
목표를 시내버스 기사로 정했기 때문에 경력이 쌓이면 바로 다음 단계인 마을 버스 운전기사에 도전합니다. 보통 마을버스는 35명승이지만 출퇴근할 때 서있는 사람까지 합하면 70-80명이 탈 수 있는 큰차입니다.
임지예: 저때는 마을버스 회사에 들어가기가 정말 하늘에 별따기였어요. 그래도 한달 견습받고는 2개월만에 배차 받았어요. 마을버스도 8시간 근무인데 학원버스는 아침 10시부터 저녁 6시까지인데 아이들 태우니까 시간을 맞출 필요도 없고 차가 막히면 천천히 해도 되고 여유시간이 많지만 마을버스는 앞차 시간도 맟춰야지 하루 몇바퀴 하는거 전부 돌아야지 신경을 엄청 써야해요. 우리 아이들이 그러는데 그때는 맥주를 박스로 사다놓고 먹었데요. 난 먹은 생각은 나는데 그렇게 박스로 사다놓고 술먹고 아이들에게 주정부리고 그런 생각은 안나요.
몸이 피곤한 것도 있지만 정신적인 피로가 상당했습니다. 하지만 그에 비해 보수는 노동일을 할 때보다 더 나빴습니다. 그래도 시내버스를 몰기 위해서는 마을버스 운전경력이 필수였기 때문에 악착같이 견뎌야만 했습니다.
임지예: 지금 보면 정말 신이 도와줬다고 생각해요. 저는 오직 시내버스를 몰아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없었어요. 사고만 안나면 된다. 여기서 운전을 잘해서 시내버스 운전을 해야한다 이런 생각만 했어요.
제2의 고향 오늘은 시내버스 기사 임지예(가명) 씨의 남한생활 이야기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