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정신없이 앞만 보고 죽자고 뛰어가다 갑자기 우뚝 서서 하늘을 바라봅니다. 탁트인 파란 하늘을 보며 답답했던 마음이 뻥 뚤리며 뜨거운 눈물이 주루룩 흘러 내립니다. 이것은 만날 수 없는 가족을 그리워 하며 열심히 사는 남한정착 탈북자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은 통역사로 세 아이의 엄마인 신의주 출신의 황재경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황재경: 대학교 졸업장 그리고 지금 건강하게 잘 크고 있는 아이들 그리고 밖에 나가면 저보고 다들 슈퍼우먼이라고 해요. 그런데 맞는 거 같아요.
지난 1999년 12월에 나진 선봉으로 장사를 갔다가 밑천을 열차에서 다 잃어 버리고 중국으로 도강했던 황 씨는 이렇게 바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대학에서는 졸업을 앞둔 학생으로 그리고 전공인 중국어 통역사로 일하면서 세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1인 3역을 하는 건데요. 황 씨가 남한에 간 것은 중국에서 강제북송을 당해 북한에서 고초를 당하는 것을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신분안전이 보장되는 남한으로 가야만 두 다리 뻗고 살 수 있겠다고 결심했던 것이죠. 그것이 황 씨가 25살 되던 2008년이었습니다. 그리고 남한에 가서는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요.
황재경: 그땐 먹는 것은 시간 맞춰 고객 집을 방문하면 점심시간에 방문할 때도 많은데 어떤 분들은 밥을 챙겨놓고 있는 분도 있었어요. 분명히 밥 안 먹었을테니까 여기서 밥 먹고 가라고 해서 밥 먹고 오는 경우도 있었고요. 또 같이 일하는 사무실 선배들이 어린나이에 와서 힘들게 산다면서 동정은 아니었고 보살핌이라고 해야 하나요? 그래서 밥도 많이 사줘서 밥은 굶지는 않았어요. 학원가면 이모들 아저씨들이 야, 이거 먹어. 이렇게 챙겨주시는 것이 많았어요,.
가정에서 마시는 물을 깨끗이 걸려주는 정수기 설치업체에 다니면서 대학입학을 준비하면서 남한생활 초기정착 생활을 했는데요. 일한만큼 그 대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좋았습니다.
황재경: 제가 일하면서 벌었던 월금이 한 300만원에서 400만원 정도 됐는데 혼자 생활비로 한 150만원을 쓰고도 200만원 정도를 저축할 수 있는 상황인데 언젠가 제가 200만원을 북한에 송금했는데 그돈으로 북한에서 입쌀을 사서 한 6개월을 먹을 수 있는 돈이라고 들었어요. 풍요롭지는 않지만 야유있게 살 수 있다고 들었어요.
남한이 북한에서 또는 중국에서 생각했던 잘사는 나라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황재경: 풍요롭다는 것은 아파트 분리수거장에 나가보면 텔레비전도 있고 소파도 있고 전자제품이 있는데 북한에서는 제가 돈을 많이 주고 샀던 기억이 나거든요. 그런데 거기 보면 가져가셔도 됩니다 하고 안내문이 붙어 있어요. 그분들은 그것을 내놓을 때엔 새것을 샀으니 내놓은 것이잖아요. 그것을 보면서 여긴 살기 좋은 곳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어요.
사람들은 흔히 10년 세월이면 강산도 한 번 변하는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남한생활 10년동안 황 씨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요.
황재경: 굵직굵직한 사건…대학입할 때인데 셋째아이 출산이 1월인데 제가 7월에 대학입학 원서를 접수 했어요. 배가 불러서 대학에 원서접수를 하러 갔는데 거기 있던 조교들이 원서는 누구껍니까 해서 내껍니다 했더니 나를 아래 위로 다시 보면서 웃어요. 그래서 왜 그럽니까 했더니 아닙니다 그래요. 지금도 그때 얘기를 하면서 놀려요. 배불러서 원서접수를 하러 와서 자기들이 너무 당황했었다고요. 그때도 너무 뿌듯했고 대학입학 때도 합격통지서를 확인해야 하는 날인데 가슴이 너무 떨려서 낮에는 못보고 새벽 2시에 일어나서 컴퓨터를 켜고 봤어요. 그랬더니 서울에 있는 3개 대학에 합격이 모두 됐어요. 그때 한 30분을 멍하니 있다가 울었던 것같아요. 나도 이제 대학생이 됐구나.
결혼과 출산 그리고 대학입학.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머리속에 그려졌고 갑자기 울컥했던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뜨거워 집니다. 북한에서 그렇게 가고 싶었던 대학을 남한에 가서야 꿈을 이룬 것이었으니까요. 공부하는 기간이 힘들었지만 그 노력의 결실은 너무 달콤하게 느껴집니다.
황재경: 북한에서 아무것도 없이 진짜 알몸으로 한국에 왔는데 검정고시를 보고 대학생이 되고 하니까 지금 4학년인데 대학졸업하니까 취직자리도 있고 또 제가 대학을 다님으로 해서 예전에 벌었던 돈 보다 더 많은 월급을 주고 저를 데려다 쓰고 싶어하는 회사들이 하나 둘 면접을 보러 오라고 해요.
일하면서 대학공부를 하고 아이들을 돌보면서는 너무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살다보니 주변을 돌아볼 경황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좀 여유를 가지고 남한에서 살아온 기억을 다시 떠올려 보니 재경이 그동안 고생 많았다 하면서 어깨를 톡톡 쓰다듬어 줄 정도로 자신이 대견스럽습니다.
황재경: 회사 다닐 때 그때 일을 정말 열심히 했나봐요. 일하는 것이 진짜 즐겁고 또 다른 고객을 만나 얘기 하는 것이 즐겁고 했는데 그때 어느 달인가 1등 사원이 돼서 120만원 상금을 받았던 기억이 나요. 그리고 대학 들어갔을 때 저희 같은 학번 동기들이 저와 띠동갑이었어요. 공부하면서 힘들고 했는데 교수님과 동기들의 도움을 받아서 17장 과제를 3일만에 완성한 적이 있어요. 그때 정말 뿌듯했던 기억이 있어요.
황 씨는 이제 1학기만 남겨둔 예비 졸업생입니다. 대학 수업이 없을 땐 국제회의나 토론회 기타 행사에서 중국어를 남한말로 바꿔 전달하는 통역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황 씨는 한국어와 중국어 말고도 또 외국어를 공부하고 있는데요.
황재경: 전공이 두 개인데요. 한 개는 중국 외교통상이고 이중전공은 독일어예요.
기자: 특별히 독일어를 공부한 이유가 있습니까?
황재경: 독일 사람들과 의사소통이 가능해 진다면 독일을 꼭 한번 가보고 싶어서요. 왜냐하면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남북한만 분단국가이고 독일은 통일이 됐잖아요. 그래서 꼭 한번 가보고 싶고 동서독의 체제와 이념이 너무 다른 남한과 북한처럼 비슷한 상황이었는데 통일이 된 후에는 이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 독일어를 신청해서 지금 재밌게 배우고 있어요.
남한생활 10년을 정리하면서 황 씨는 북한을 자연스레 떠올리며 목소리에는 애잔함이 묻어납니다. .
황재경: 제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있네요. 집에 들어가면 엄마고 학교 가면 학생이고 일하는 곳에 가면 통역이예요. 그리고 밤에 텔레비젼 여행광고를 보다가 주말에 아이들을 데리고 운전해서 휴양지로 떠날 수 있는 그런 환경의 삶이 지금 주어졌는데 좋아요. 뿌듯하고 잘 왔다는 생각이 들고요. 그리고 아직 고향에 있는 사람들이 좀 안 됐다는 생각이 잠깐 드네요.
(음악)나에게 그대만이 유해준
더 이상 나에게 다른 사랑은 없다는 걸 이제 나는 알아요 . 나에게 사랑은 항상 하나뿐이였다고 나의 사랑은 그대 단 한사람 나에겐 오직 한 사람 세상 누구보다 내게 소중한 사람 널 사랑해 …..
어쩌면 지금 만날 수는 없지만 북한에 있는 가족을 떠올리며 황 씨는 이 노래를 불렀을지 모릅니다. 때론 힘들고 지친 몸을 일으켜야할 때 소중한 가족을 그리워하면서 말입니다. 목숨을 건 탈북에 이은 과감한 도전이 이룬 제 2의 인생은 앞으로도 계속 됩니다.
황재경: 계획은 유능한 통역사가 되고 싶고요. 해보니까 너무 재밌어요. 소망이라면 물론 여기 와있는 북한에서 내려와 사는 사람 모두가 그렇겠지만 남북관계가 잘 돼서 이산가족상봉도 되고 저희도 언젠가는 고향에 가볼 수 있는 그런 날이 오길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 있어요.
제2의 고향 오늘은 신의주 출신의 통역사 황재경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