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미-쿠바 수교와 북한의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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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사람들은 12월 17일을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의 기일로만 기억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작년 12월 17일에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사건, 그것도 북한 정권과 주민들에게 적지 않은 의미를 가진 사건이 발생한 날입니다. 미국과 쿠바가 수교를 선언한 것입니다. 이날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은 쿠바와의 관계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위한 역사적 조치들을 취할 것이다"라고 선언하고 존 케리 국무장관에게 즉각 쿠바와의 외교관계 정상화를 위한 준비를 지시했습니다. 같은 시각 쿠바의 라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도 같은 내용을 발표함으로써 이제 미-쿠바 수교는 초읽기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쿠바가 고립의 길을 걷고 있는 몇 안 되는 사회주의 국가로 남아 있었다는 점에서, 미-쿠바 수교는 마지막 남은 은둔의 나라 북한에게도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던져주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번 수교협상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중재가 큰 역할을 했다는 점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양국이 억류하고 있던 상대국 인사의 맞교환을 권고했고, 미국과 쿠바가 이를 받아들여 협상에 들어가게 되고 억류자 석방이 성사되면서 오바마 대통령과 카스트로 평의회의장 간의 전화통화가 이루어지게 되고 결국 수교합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쿠바 입장에서 보면 이번 대미수교는 갑작스럽게 닥친 사태라기보다는 오랜 기간 준비하고 추진해온 국가적 사업을 성사시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쿠바는 지난 53년간 미국과 적대관계에 있었고, 미-쿠바 간 긴장은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1959년 피델 카스트로의 공산혁명이 일어나자 미국은 카스트로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1961년 특공대를 쿠바에 상륙시키는 피그만 작전을 감행했었고, 1962년 소련이 쿠바에 핵미사일 기지 건설을 추진하자 미국은 해상봉쇄를 통해 소련 함정의 접근을 차단했는데, 이 때 미국과 소련은 일촉즉발의 핵전쟁 위기를 겪기도 했습니다. 이후에도 미국의 경제봉쇄는 지속되었고, 장기간에 걸친 경제봉쇄는 쿠바 국민을 가난에 쪼들리게 만들었습니다. 미국행을 원하는 쿠바 난민과 망명자가 줄을 이었고, 그 결과 오늘날 플로리다에는 100만 명의 쿠바인들이 미국시민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렇듯 앙숙관계에 있던 양국관계가 개선의 급물살을 타게 된 것은 2006년 피델 카스트로가 장출혈로 입원하고 동생 라울 카스트로가 권력을 이양 받으면서부터였습니다. 라울 카스트로는 형을 도와 쿠바 혁명의 전 과정을 함께 해온 인물이며, 한 때는 피델 카스트로가 "내 뒤에는 나보다 더 강력한 사람이 있다"라고 말할 정도로 강경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였습니다.

라울 카스트로는 2006년 형의 건강이 악화되자 일시적으로 권한을 넘겨받아 형을 보좌했고, 2008년에는 국가평의회 의장에 취임하면서 정식으로 권력을 이양 받았습니다. 이런 쿠바에서 '위로부터의 개혁'을 주도한 것은 다름 아닌 강력한 사회주의자였던 라울 카스트로 그 자신이었습니다. 국민의 궁핍을 안타깝게 생각해온 그는 "정부가 주는 돈만으로는 국민이 살 수 없다"고 선언하고 국유산업의 비효율성을 비난하면서 개혁개방의 깃발을 높이 들었습니다. 토지이용 규제 완화, 농업 개혁, 정치범 석방, 정부 구조조정, 자영업 허용 등의 시장경제로의 개혁조치들이 취해지고, 2013년에는 해외여행 자유화와 자동차 시장 개방이 단행되었으며, 2014년에는 해외투자 유치를 위한 246개의 투자프로그램이 공개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이 좋아질 수는 없었습니다. 쿠바는 오랜 고립과 제재 속에서 경제의 인프라가 붕괴된 상태였고, 세계경제의 후퇴에 따라 저성장의 늪에서 허우적거려야 했습니다. 결국, 라울 카스트로가 미국과의 수교를 결심한 것은 바로 궁핍에 허덕이는 쿠바를 살려내고 국민들의 삶의 질을 높여야 한다는 의무를 절감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베트남, 미얀마 등이 개혁개방에 나서고 쿠바마저 고립을 벗고 대미수교에 나섬에 따라 이제 북한은 지구상에 남은 거의 유일한 은둔의 나라가 되고 있습니다. 쿠바의 일인당 국민소득이 약 7,000달러로 세계 100위 이내에 든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국민소득 1,200달러로 최하위에 머물고 있는 북한이야말로 개혁개방이 시급한 나라입니다. 북한정권은 변화를 향한 쿠바의 몸짓이 어떤 유의미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는지를 곱씹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