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20일에서 26일까지 금강산 면회소에서는 제20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열렸습니다. 이번 상봉에는 600대 1의 경쟁을 뚫고 선발된 남측 이산가족들이 북측의 가족을 만났는데 이들은 2차에 걸쳐 상봉행사를 가졌습니다. 20일에서 23일까지 진행된 제1차 만남에서는 남쪽의 96개 이산가족과 동반가족, 지원인력, 취재단 등 536명이 북측에서 온 141명의 방문단을 만났고 24일에서 26일까지 진행된 2차 만남에서는 남측의 90여 이산가족, 동반가족 등 255명이 북측 상봉단 188명을 상봉했습니다. 이들은 2박 3일 일정으로 단체상봉, 환영만찬, 개별상봉, 공동중식, 단체상봉, 작별상봉 등을 가졌습니다.
이 행사를 통해 85세의 이순규 할머니는 북측에서 온 남편인 83세 오인세 할아버지를 만났습니다. 결혼한지 1년이 되던 1950년 전쟁이 터졌고, 남편은 "열흘만 훈련을 받고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간 후 65년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신혼집에 홀로 남겨진 새색시는 꿈틀거리는 뱃속 아들을 어루만지면서 남편이 돌아올 날을 기다리며 이사도 가지 않고 긴 세월을 기다렸습니다. 남편이 사용했던 구두랑 물품들을 소중하게 간직하면서 그렇게 65년의 세월을 보낸 것입니다. 사망했을 거라는 생각에 제사를 지낸지도 이미 37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랬던 새색시가 팔순을 넘긴 호호백발 할머니가 되어 65세의 아들과 함께 꿈에 그리던 남편을 다시 만난 것입니다. 2015년 10월 20일 이들 노부부가 65년 만에 마주 앉았을 때 허망하게 흘러가버린 세월 속에 눈물조차 메말랐던지 어색한 대화로 대면을 시작했습니다. "미안하오 돌아가지 못해서..." 할아버지의 말에 할머니도 말문을 열었습니다. "괜찮아요. 세상을 떠난 줄 알았는데, 살아있어 주어서 고마워요. 여보…" 이내 두 노인의 눈시울은 붉어졌고, 그렇게 하여 눈물 속에 65년간 닫아 두었던 이야기 보따리를 열었습니다. "주름이 졌어도 그 미소는 19살 소녀 때와 같구먼…." 할아버지의 칭찬에 할머니도 화답했습니다. "당신을 다시 만난다는 소식에 결혼식을 하던 그날처럼 가슴이 뛰었어요." 그리고는 부부의 이름이 새겨진 손목시계를 남편에게 선물했습니다. 65년 만에 만난 노부부와 아들의 만남은 그렇게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2박 3일이라는 기간은 생사 여부도 모른 채 평생을 헤어져 살아온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기에는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어느덧 다가온 작별의 시간이 되자 오인세 할아버지는 북쪽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야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창문으로 손을 내밀었고 할머니는 그 손을 꼬옥 잡았습니다. 잠시 동안의 만남이 끝나고 기약없는 이별을 시작해야 하는 힘든 순간이었습니다. 두 노인은 망연자실과 아쉬움으로 뒤범벅된 눈물을 뿌리면서 그렇게 서로를 떠나 보내야 했습니다.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이것이 그들이 나눈 마지막 대화였습니다.
상봉행사는 2000년 8월에 시행된 제1차 상봉 이후 남북관계의 기복에 따라 끊겼다가 이어지기를 반복하면서 현재 20차에 이르고 있습니다. 상봉 때마다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픈 사연들이 이어졌고 상봉행사장은 언제나 눈물과 통곡이 가득했습니다. 이순규 할머니와 오인세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새털처럼 많은 슬픈 이야기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번 이산가족 상봉 행사는 진실로 중대한 두 가지 과제를 재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첫째, 상봉에 참여하는 인원수를 대폭 늘리고 정례화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20차례의 상봉이 있었지만, 참가한 가족은 2,200여 명으로 애초에 이산가족정보통합시스템을 통해 상봉을 신청했던 13만 명의 2%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 중 절반 가까운 숫자가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1세대 이산가족들이 고령으로 매년 수천 명씩 세상을 떠나면서 부부 상봉과 부모자식 상봉, 형제 상봉 등은 줄어들고 친인척 상봉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나마 생존한 이산가족들 중에서도 건강이 여의치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번 제20차 상봉에서도 구급차를 타고 상봉장으로 이동한 분들이 있었고 산소마스크로 산소공급 받으면서 나온 분들도 있었으며 무려 24명이나 되는 노인들이 휠체어를 타고 상봉행사에 참여했습니다. 2명은 선발이 되고도 건강문제로 상봉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둘째, 상봉 이후에도 상호 연락할 수 있어야 합니다. 2박 3일이라는 짧은 재회 후 영원한 이별을 강요하는 현재의 상봉방식은 당사자들에게 너무나 가혹한 것입니다. 상봉 후에도 서로의 안부를 묻고 건강과 생사 여부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북한 정부는 더 이상 이산가족 문제를 대남 협상수단으로 삼지 말고 순수한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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