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피델 카스트로의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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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25일 쿠바의 혁명 영웅이자 독재자 피델 카스트로(1926~2016)가 향년 90세로 사망했습니다. 쿠바 정부는 9일간의 애도기간을 공표했고, 카스트로의 유해는 화장이 되어 전국을 순회한 뒤 12월 4일 쿠바 제2의 도시이자 그가 혁명의 성공을 선포했던 혁명의 도시 산티아고데쿠바에 안장되었습니다.

카스트로는 어린 시절부터 반항아 기질이 강했던 소년이었습니다. 청년이 되어 아바나대 법대를 졸업한 후에는 달변가이자 혁명가로 변신했습니다. 카스트로는 1952년 쿠테타를 통해 집권한 바티스타 정권에 거세게 저항했고, 1953년에는 정부군에 대항하는 게릴라군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이후 카스트로는 2년 만에 특별사면을 받고 석방되어 멕시코로 망명하게 되는데, 거기서 중남미 해방운동의 선구자로 불리던 혁명동지 체 게바라를 만나게 됩니다.

카스트로는 1956년 혁명군을 조직하여 다시 쿠바로 들어와 정부군과 전투를 벌이고 1959년 마침내 부패한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고 쿠바 혁명에 성공합니다. 이후 카스트로는 질병으로 인하여 2008년 국가평의회 의장직을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에게 넘겨줄 때까지 장장 49년 동안 세계 최장수 독재자로 쿠바를 통치하게 됩니다.

카스트로는 통치자가 된 첫해에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자본을 몰수하고 대대적인 토지개혁을 실시했으며, 무상교육, 무상의료 등을 통해 쿠바를 완전한 사회주의 국가로 탈바꿈시켰습니다. 1961년 미국과 단교했고 1962년에는 소련의 중거리 핵미사일을 쿠바에 배치하려 했다가 미국이 이에 반발하여 해상봉쇄에 나섬에 따라 미소 간에는 일촉즉발의 핵전쟁 위기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카스트로는 전 세계의 혁명을 위해 남미와 아프리카에서 혁명운동을 전개했던 전설의 혁명가 체 게바라의 뒤를 이어, 전 세계에 사회주의 혁명을 확산시키는 혁명 수출가로서의 역할도 담당했습니다. 이를 위해 카스트로는 앙골라, 에티오피아 등 곳곳에 쿠바 혁명군(MPLA)을 파병했습니다. 정치인으로서의 카스트로는 혹독한 독재자로서 많은 정적들을 제거하고 반체제 인사들을 체포하여 고문하는 등 수많은 인권침해를 저질렀습니다. 이에 수많은 쿠바인들은 미국으로 망명했습니다. 쿠바섬으로부터 145km 떨어진 미국 플로리다주의 마이애미는 120만 명의 망명 쿠바인들이 모여 사는 지역으로 '리틀 아바나'로 불리고 있습니다.

카스트로의 행적 중에 한가지 이색적인 것은 미국의 소설가로 1954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1899~1961)와의 관계였습니다. 헤밍웨이는 1930년대 스페인 내전이 보여준 삶과 죽음을 생생하게 묘사한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집필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파리 해방작전에 참전한 참전용사로 잠시 변신했지만, 30년대에서 50년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주로 쿠바에 머물렀습니다.

그는 카스트로 혁명 직후인 1960년 미국으로 추방되기까지 수많은 주옥같은 작품을 쿠바에서 집필했습니다. 카스트로는 헤밍웨이를 '유일하게 사랑하고 존경하는 미국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카스트로는 헤밍웨이를 기리는 '헤밍웨이 프로젝트'를 발족시키면서 행한 연설에서 "헤밍웨이가 쿠바에서 문학적 영감을 얻었다면 나는 헤밍웨이로부터 혁명의 영감을 얻았다"고 말했습니다.

아바나 앞 바닷가 고히마르 마을의 그가 살았던 집은 카스트로의 지시에 따라 헤밍웨이 박물관으로 보존되고 있는데, 그는 이곳에서 '노인과 바다'를 집필했습니다. 또한 헤밍웨이가 고히마르에 정착하기 이전인 1932년에서 1939년까지 머물렀던 아바나의 호텔방은 그의 유품들을 전시한 전시관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 호텔방에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집필했습니다.

카스트로의 혁명은 쿠바 국민에게 많은 불행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쿠바가 1961년 미국과 단교하고 세계에 혁명을 수출하면서 미국과 서방세계의 대 쿠바 봉쇄정책은 강도를 더해갔습니다. 사회주의 경제의 비효율성이 공산독재와 결합되면서 쿠바 경제는 정체되었습니다. 쿠바는 서인도제도의 아름다운 섬나라로, 음악을 사랑하는 국민과 환상적인 관광자원을 가진 나라이며, 19세기에는 세계 최대의 설탕 생산국이기도 했습니다. 카스트로의 사회주의 독재는 이런 쿠바를 궁핍과 고립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그러나 2008년 병약해진 카스트로로부터 국가평의회 의장직을 넘겨받은 동생 라울 카스트로는 사회주의 경제의 비효율성을 극복하기 위한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향한 개혁개방에 착수했습니다. 개혁개방 움직임과 함께 2015년 미국과의 수교를 재개했고, 금년 3월에는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쿠바를 방문했습니다.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88년 만의 쿠바 방문이었습니다.

카스트로는 조그마한 섬나라의 통치자였지만 너무나 오랫동안 미국의 대외정책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혁명의 깃발을 들었지만 자기 국민을 불행에 빠뜨렸으며, 말년에는 병실에 누운 채 자신이 수립한 체제들이 하나 둘 무너져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그런 카스트로도 결국 한 줌의 재로 돌아갔습니다. 그가 죽자 리틀 아바나에서는 축제가 열렸습니다. 그래서 많은 나라의 지도자들은 카스트로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상념에 잠겨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