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겐셔 전 독일 외교장관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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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1일 한스 디트리히 겐셔(Hans-Dietrich Genscher) 전 독일 외교장관이 별세했습니다. 겐셔 장관은 1927년 동독 지역이던 작센안할트주 라이데부르크에서 출생하여 1952년 서독으로 탈출한 젊은이었습니다. 그는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1965년 서독 연방하원의원에 당선되었고, 1969년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 총리의 연합정부에서 내무장관으로 기용되었으며, 5년 후인 1974년 사민당의 헬무트 슈미트 총리 하에서 외교장관으로 발탁되었습니다.

이후 기독민주당의 헬무트 콜 총리가 집권했지만, 콜 총리는 겐셔 장관을 내치지 않았습니다. 겐셔 장관은 통일독일의 첫 외교장관을 지내다가 1992년 스스로 물러나기까지 무려 18년 동안 독일의 통일외교를 지휘한 외교의 야전군사령관으로서 소임을 다하고 1998년 정계를 은퇴했습니다.

독일 통일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 중에는 빌리 브란트 제4대 총리와 헬무트 콜 제6대 총리 그리고 겐셔 외교장관이 있습니다. 빌리 브란트 총리는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했을 당시 스칸디나비아로 망명해 구국운동을 벌였던 젊은 정치인이었고, 1957년에 분단의 상징인 베를린의 시장에 당선되었으며, 총리가 된 이후에는 동독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소련 및 동구권 국가들과의 화해협력을 추구해나가는 신동방정책을 펼쳤습니다.

이에 따라 동서독은 1972년 기본조약을 체결하고 1973년에 나란히 유엔에 가입했으며, 1974년에 외교대표부를 교환했습니다. 1974년에서 1982년까지 재임한 헬무트 슈미트 제5대 총리 시절에도 서독은 신동방정책을 계승 관리하면서 1975년 헬싱키협약(Helsinki Fianal Act)을 선도했습니다.

헬싱키협약은 나토와 바르샤와 동맹 35개 회원국들이 유럽의 안보협력을 위해 주권존중, 무력불사용, 영토주권 보장, 분쟁의 평화적 해결, 내정불간섭, 국제법 준수 등 10개 원칙에 합의한 것으로 국제무대에서 인권 문제를 다루는 큰 틀을 제공했습니다. 이 협약은 독일통일에 대한 외부 군사적 개입을 부당한 것으로 규정한 성격이 있었기에 소련의 군사개입을 예방하는데 기여했습니다.

브란트 총리와 슈미트 총리가 독일의 외교무대를 넓히고 양독간 교류를 위한 여건을 조성한 인물이라면, 1982년부터 1998년까지 16년동안 재임한 콜 총리는 적극적으로 동독의 변화를 선도하여 통일을 이룩한 후 통일독일의 첫 총리로 재직하는 영예를 안은 본격적인 통일지도자였습니다. 콜 총리는 동독과의 교류에 힘쓰면서도 힘의 우위 및 대동독 원칙을 철저하게 고수했으며, 미국과의 동맹을 통일외교에 적극 활용함으로써 주변국 및 소련의 동의를 얻어내고 마침내 평화통일을 이룩했습니다.

콜 총리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자 “독일과 유럽의 분단을 극복하기 위한 10대 원칙”을 발표하여 장벽의 붕괴를 통일로 연결시키겠다는 의지를 밝혀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냈습니다. 서독의 이니셔티브에 힘입은 동독 국민의 통일 행보는 가속화되었으며, 마침내 1990년 3월 18일 동독에서는 처음이자 마지막 직접 투표를 통한 총선이 실시되어 신속한 통일을 공약한 기민당 주도 독일동맹이 압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순간 독일통일은 사실상 기정사실이 되었습니다.

이후의 통일과정은 신속하게 진행되었습니다. 1990년 5월 5일 역사적인 2+4 회담이 개최되어 9월 12일 종결되었는데, 이 회담에서 동서독과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등 4대 점령국은 통일 이후 현재의 오데르-나이제 국경선 준수, 통일독일의 군대 규모 37만명 이하 한정, 핵·화생무기 등 대량살상무기 불보유, 소련군 철수 이후 동독지역 외국군 주둔 금지 등에 합의했습니다. 이로서 점령국들은 독일통일 불반대 입장을 정리하고 동서독 간의 합의를 존중하며 독일인의 주권을 인정하기로 합의한 것입니다.

1990년 10월 3일 독일은 마침내 통일을 이루었으며, 25년이 지난 오늘날 통일독일은 인구는 8천백만 명으로 세계 18위이지만 GDP 3조 4천억 달러의 세계 4위의 경제강국이자 제3위의 무역대국이며, 독일의 GDP는 28개국으로 구성된 유럽연합 전체 GDP의 1/4이 넘습니다.

이렇듯 눈부시게 진행된 독일 통일외교의 중심에는 늘 겐셔 외교장관이 있었습니다. 겐셔 장관은 탁월한 협상력으로 국제사회의 신뢰를 확보하는데 앞장섰습니다. 서독의 외교수장으로서 2차대전 피해국들에게 사과하는 사죄외교를 반복했고, 헬싱키협약을 성사시키고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을 통일의 후원자로 만든 주역이었으며, 소련과 인근국들의 반대를 불식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했습니다.

동독과의 프라이카우프(Freikauf)를 협상하는 과정에서 그가 보인 노력도 평가 받아 마땅합니다. 프라이카우프란 서독정부가 1963년부터 1989년까지 동독내 반체제 인사와 정치범 그리고 가족 3만 4천여 명을 서독으로 송환하고 대가로 일인당 약 5천만 원을 동독정부에 지불한 것을 말합니다.

겐셔 장관의 부음에 접하여 역시 동독 출신인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위대한 독일인이자 위대한 유럽인이 우리 곁을 떠났다”고 애도의 메시지를 발표했습니다. 메르켈 총리는 1990년 동독정부의 부대변인 자격으로 서독의 겐셔 장관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겐셔 장관으로부터 받았던 감명이 이후 통일독일에서 총리에 오르기까지의 인생 과정에서 큰 힘이 되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겐셔 장관은 통일을 염원하면서 살고 있는 한국 국민들의 가슴 속에 큰 울림을 남긴 채 조용히 세상을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