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전승기념일과 북한의 정상외교

0:00 / 0:00

금년 5월 9일 러시아는 제70회 전승기념일을 맞게 됩니다. 전승기념일이란 나치 독일을 물리치고 2차 대전에 승리한 날을 기념하는 것으로 유럽에서는 독일이 연합군에게 공식 항복한 5월 8일을 ‘유럽승리의 날’로 기념하고 있지만 러시아는 히틀러의 후계자로 지명된 되니츠 제독이 소련군이 점령한 베를린에 와서 항복조인식에 서명한 5월9일을 전승기념일로 삼고 있습니다.

소련은 4년간의 독소전쟁에서 2천만 명이 넘는 사망자를 기록했는데, 당시 스탈린은 “우리나라에는 전쟁으로 친지를 잃지 않은 사람은 없다”라는 말로 막대한 인명피해를 개탄했다고 합니다. 이 날이 되면 러시아 사람들은 ‘꺼지지 않는 불’ 앞에 헌화하고 참전 노병들에게 꽃을 선물하면서 전몰용사들을 기리는 시간을 가지며,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서는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가 벌어집니다.

냉전기간 동안 소련의 전승기념일은 공산국가들의 단합을 과시하는 행사로 변질되기도 했으나,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에는 함께 대독 전쟁을 수행한 서방국의 정상들을 초대하게 되었고, 이에 미국, 프랑스, 중국, 일본 등의 정상들이 러시아의 전승기념일에 참가하기도 했으며,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도 참가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금년에는 분위기가 냉랭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러시아는 금년에도 많은 나라의 정상들에게 초청장을 보냈지만, 푸틴 대통령의 팽창주의 대외정책과 크리미아 반도 합병에 대한 국제사회의 대러시아 경제제재가 시행되고 있는 중이어서 서방국들이 러시아의 전승기념일 참가를 외면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도 불참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세계인의 관심을 끄는 한 가지는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참가 가능성 및 정상외교 행보입니다. 아시다시피 북한은 작년 11월 김정은 제1위원장의 특사 자격으로 최룡해 노동당 비서를 러시아에 보내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과 회담을 가지게 했고, 이어서 러시아는 김정은 제1위원장을 전승기념일에 초대한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최근 북러관계가 전반적으로 강화되고 있음도 사실입니다.

최근 러시아는 북한이 러시아에 갚아야 할 110억 달러의 부채 중 100억 달러를 탕감해주었고, 러시아의 카잔과 북한의 특별경제구역인 나진ㆍ선봉을 잇는 철도를 건설해 주었으며, 지금도 북한 철도 현대화 사업을 위한 협력을 논의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러한 북러간 접근은 대중 의존도를 낮추기를 원하는 북한과 국제적 고립으로부터의 탈피를 원하는 러시아 간의 이해가 일치함으로써 나타나는 현상일 수 있습니다만, 어쨌든 이런 가운데 금년에도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로두철 내각 부총리 등이 러시아를 방문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 김정은 제1위원장의 러시아 전승기념식 참가가 유력해 보입니다.

만약 김 제1위원장이 이번에 모스크바를 방문하게 되면 2011년 집권 이후 첫 외국 방문이 됩니다.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이 러시아 전승기념일 행사에 불참할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제3국에서의 남북 정상회담 가능성은 일단 오는 9월 중국의 70주년 전승기념일까지 미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만, 세계는 모스크바에서의 북-중 정상회담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으며, 북한이 대중관계와 대러관계를 어떻게 조화시켜나갈 것인가에 대해서도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또한, 북한의 젊은 지도자가 처음으로 밟게 되는 다자 정상외교 무대에서 어떤 역량을 발휘하고 어떤 이미지를 각인시킬 것인가에 대해서도 세계인의 관심이 집중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어쨌든 북한이 김정은 제1위원장의 다자 정상외교를 통해 고립을 탈피하고 책임있는 일원으로서 국제사회에 합류하는 길을 택한다면, 한국 국민은 국제사회와 더불어 이를 크게 환영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