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다시 레이건 대통령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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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이 되면 생각나는 것들이 많지만, 미국인들이라면 2004년 6월 5일 타계한 제40대 대통령 로날드 레이건(1981~1989)을 떠올릴 것 같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은 특유의 낙관주의적 신념과 기질로 미국인들에게 비전과 희망을 던져준 지도자였습니다. 레이건은 1911년 일리노이주 템피코에서 가난한 구두판매원의 아들로 태어나서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후 아나운서로 일했다가 1937년부터 헐리우드에 입성하여 1942년까지 약 50편의 영화에 출연하는 영화배우로 활동했습니다.

2차 대전 때에는 공군에 복무했고 1962년 공화당에 입당하여 보수주의 정치인으로 변신했으며, 1966년에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당선되었습니다. 주지사로 재임하는 동안 조세감면, 복지제도 축소 등을 통해 주 재정을 적자에서 흑자로 바꾼 일화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의 대통령 도전 여정도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레이건은 1968년과 1976년에 공화당 대통령 후보경쟁에 뛰어들었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1980년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어 민주당의 지미 카터 대통령을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고 1984년에 재선되어 1989년까지 8년간 미국을 이끌었습니다.

레이건은 미국이 여러 면에서 어려웠던 시기에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당시 세계경제는 1973년 석유파동의 후유증으로 휘청거리고 있었고, 미국 역시 베트남 전쟁의 후유증에 경제불황까지 겪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베트남에 50만 명을 파병하여 매월 20억 달러의 전비를 쏟아 부으면서 제2차 대전 동안 사용된 폭탄보다 더 많은 폭탄을 베트남에 투하했지만 5만 명의 전사자를 내고 1973년에 철수했습니다. 미국 사회 곳곳에는 이 베트남 전쟁의 트라우마가 남아 있었습니다.

냉전도 한창이어서 미국과 소련 간의 핵무기 경쟁도 절정이었습니다. 그래서 Paul Kennedy같은 학자는 “미국의 전성기는 끝나고 쇠퇴기로 들어서고 있다”고 예언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등장한 레이건 대통령은 특유의 낙관론을 앞세우고 세금 인하로 경제를 되살리고 국가위상을 회복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이런 공약은 오직 마술이나 주술로만 가능할 것이라고 빈정댔지만, 레이건은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리고는 미국 국민에게 가장 인기있고 사랑받는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레이건은 부인 낸시 여사를 무척 사랑하여 주위의 시샘을 받았으며, 언제나 유머를 잊지 않았습니다.

1981년 3월 레이건 대통령은 노동계 지도자들과의 오찬을 마치고 나오던 도중 정신질환자의 저격을 받아 병원으로 이송된 적이 있습니다. 비보를 듣고 달려온 낸시 여사에게 건넨 첫 마디는 “여보, 내가 엎드리는 것을 깜빡 잊었소” 였습니다. 대통령인 자신이 저격된 엄중한 상황에서 터져 나온 유머 한마디에 미국 국민은 열광했습니다. 총알이 심장에서 12cm 거리로 비껴가는 바람에 대통령이 목숨을 건진 사건이었습니다. 레이건에게는 어두움, 초조함, 근엄함 그리고 냉랭함 같은 것은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낙관, 신념, 소신, 친근감 그리고 유머만 있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레이건이 미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 중 한 사람이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레이건 대통령이 추진한 전략방어구상(SDI), 즉 ‘별들의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는 레이건 대통령이 1983년 3월 23일 TV연설을 통해 밝힌 계획으로 소련의 모든 핵공격으로부터 막아내는 다층 방어체계(Multi-Layer Defense)를 구축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우주와 하늘 그리고 지상과 해상에 방대한 요격시스템을 구축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지구궤도를 선회하는 우주선에 배치된 요격무기로 소련이 발사한 핵미사일이 추진체와 탄두가 분리되기 이전에 초기 요격을 하고, 그것이 실패하면 우주와 해상과 그리고 지상에 배치된 요격무기로 중간경로(Mid-Course) 단계에서 요격하며, 그것마저 실패하면 지상에 배치된 종말단계 요격무기로 다시 요격을 시도하는 체계를 갖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방어체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재정과 고첨단 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에, 과학적 타당성과 재정적 실현성을 둘러싼 많은 논란이 유발되었습니다. 칼 세이건(Carl Sagan) 같은 천문학자는 우주를 평화적으로 이용하기로 합의한 외계조약(Outer Space Treaty, 1967)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반대했고, 다른 전문가들은 미국과 소련이 상호간 방어노력을 제한하기로 합의했던 1972년 미사일방어제한조약(AMB Treaty)을 폐기해야 한다는 이유로 반대했습니다. 특히 우주에 레이저빔, 레일건 등을 장착한 많은 위성무기들을 배치하겠다는 부분에 대한 논란이 컸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은 이들 우주무기들을 ‘brilliant pebbles,’ 즉 ‘찬란한 자갈들’이라고 불렀고, 반대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연구에 돌입하여 소련을 압박했습니다.

이 시기 동안 소련도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소련 국민들은 낙후한 경제와 선진국들과의 경제격차에 불만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은 아프간에서 소련군에 저항하는 반군을 지원하고 사우디아라비아와 협력하여 낮은 석유가를 유지하여 소련의 재정을 압박했으며, 거기에 더하여 전략방어구상을 통해 소련의 방대한 핵군사력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계획에 착수한 것입니다.

소련연방은 1991년 12월 25일 붕괴되고, 15개 공화국이 분리 독립했습니다. 1917년 블라디미르 레닌의 볼세비키 혁명과 함께 탄생한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연방은 74년 만에 막을 내린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전략방어구상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소련은 미국이 전략방어구상을 완성하면 자국의 핵군사력이 무력화될 수 있음을 의식하여 이를 돌파할 수 있는 새로운 공격용 핵무기 개발에 엄청난 재원을 투자했고, 이것이 소련의 경제를 파국으로 몰아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입니다. 소련의 붕괴와 함께 전략방어구상도 중단되었습니다. 요컨대, 레이건은 소신과 철학 그리고 넘치는 유머로 국민의 사랑을 받은 대통령이었지만, 그가 미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 중 한 사람이 된 핵심적인 이유는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소련연방을 해체시키고 냉전을 승리로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한 영웅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재임기간이 끝나고 나면 퇴장이 매우 깔끔하다는 점입니다.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은 퇴임 후 자신이 자란 향리로 들어가 칩거하다가 조용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스라엘의 골다 메이어 수상은 퇴임 후 국가가 제공하는 일체의 예우를 사양하고 허름한 정착촌에서 서거했습니다. 레이건 대통령도 그랬습니다. 퇴임 후 1994년 레이건은 국민에게 고백했습니다. 그는 “나의 친구 미국 국민에게” 라는 고별편지에서 자신이 치매에 걸린 사실을 공개했고, 그리고는 칩거에 들어갔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은 2004년 6월 5일 낸시 여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생을 마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