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6.25전쟁 65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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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5일은 6.25전쟁 발발 65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시작된 이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1129일 동안 한반도를 피로 물들였습니다.

이 전쟁을 요약한다면, 북한의 입장에서는 ‘실패한 공산통일 시도’ 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기습남침의 성공으로 한반도 전체의 적화통일을 눈앞에 두었다가 유엔군의 개입으로 무산되고 도리어 패망할 뻔 했다가 중국의 도움으로 생존을 유지한 전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전쟁대비의 중요성을 잊고 있다가 북한군의 남침으로 패망하기 직전 미군과 유엔군의 도움으로 회생하여 자유민주주의 통일을 시도했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좌절 당한 전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지금도 남조선과 미 제국주의자들의 북침을 막아낸 전쟁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런 주장은 생생하게 남아 숨쉬고 있는 역사를 모욕하는 것입니다.

전쟁 발발 당시 북한군은 20만 병력에 240여대의 탱크와 수십 대의 장갑차 그리고 전투기를 포함한 170여 기의 항공기를 가지고 있었으며, 북한군에는 중국 팔로군 출신 등 중국의 국공내전에 참전했던 경험자들이 많았습니다. 한국은 총병력 10만 5천 명에 탱크와 전투기는 전무했고, 훈련기와 연락기 22대를 보유하고 있었을 뿐이며, 한국군은 대부분 신병들로 구성된 오합지졸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산업시설이 북한에 있었고 북한지역의 발전량과 석탄생산이 남한의 네 배에 달할 만큼 경제적으로도 북한이 우세했습니다. 이런 한국이 북침을 했다는 주장은 한 마디로 어불성설입니다.

전쟁이 전개된 역사를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6월 25일 38선을 돌파한 북한군은 사흘만인 6월 28일 서울을 점령했습니다. 한국의 이승만 정부가 부랴부랴 맥아더 장군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주일미군 제24사단의 일개 대대가 황급하게 파병되지만 파죽지세로 남하하는 북한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한국은 정부를 대전으로 옮기지만 한미 연합군이 오산-평택과 대전에서 패전함에 따라 허겁지겁 피신하여 결국 부산까지 내려갑니다. 대전을 점령한 후 북한군의 일부는 서쪽으로 전라도 지방을 유린했고, 다른 일부는 경부선을 따라 대구로 향했으며, 다른 일부는 영남해안 지방으로 진출했습니다. 북한군 점령지역에서는 무수한 학살과 납치가 자행되었고, 수십만 명의 남한 장정들이 북한군으로 강제 징집되어 총알받이로 나서야 했습니다.

1950년 7월말, 그러니까 전쟁 발발 한달 만에 북한군은 낙동강 이남의 경상도 지역을 제외한 남한 대부분을 석권한 것입니다. 이후 미군이 증파되고 한국군이 재정비되면서 한미연합군은 마산-왜관-영덕-포항을 잇는 방어선을 구축하지만 대한민국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습니다.

북한군이 이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시작한 전투가 1950년 8월 15일부터 수주일 동안 대구 북방 다부동에서 전개된 전투입니다. 다부동 전투에서 한미연합군이 미 공군의 공중폭격에 힘입어 힘겹게 방어선을 지켜냄으로써 북한군의 기세는 꺾이게 되고 한국은 회생하게 됩니다. 이 전투에서 북한군은 1만7천 명의 사상자를, 그리고 한미군은 1만 명의 사상자를 내는데, 지금도 생존하고 있는 체험자들은 “당시 다부동 계곡에는 전사자들의 시신들이 널려 있었다”고 회상하고 있습니다.

이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는 역전되고 북한군은 퇴각하게 되며, 한국군과 유엔군은 38선을 돌파하여 평양을 점령하고 북진하여 압록강에 도달하지만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또 다시 후퇴하게 됩니다. 이후 전쟁은 중부전선에서 교착되고 결국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을 맺게 됩니다.

전쟁은 너무나 큰 상흔들을 남겼습니다. 한국은 군 사상자 62만 명, 민간인 사망자 24만 명, 북한군에 학살된 민간인 13만 명, 부상자 23만 명, 피랍자 8만5천 명 등 100만명 이상의 인명피해를 겪었습니다. 유엔군의 사상자도 15만 명이나 되었고 이중 미군 전사자만 3만7천 명에 달했습니다. 북한도 80만 명의 군 사상자와 30만 명의 민간인 피해를 겪었습니다. 인해전술을 펼쳤던 중공군의 경우 전사자만 11만6천 명이었고 부상자도 21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이 전쟁은 한국에서 ‘6.25 전쟁’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북한은 ‘조선전쟁’ 또는 ‘조국해방전쟁’으로 부르며, 중국은 미국에 저항하기 위해 북한을 도운 전쟁이라는 의미에서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그럼에도, 누가 어떤 이유로 어떻게 부르든 6.25 전쟁은 북한이 도발하여 수많은 인명피해를 발생시키면서 한반도를 비극의 땅으로 만든 전쟁이었다는 역사적 진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다부동 전투의 영웅 백선엽 장군은 아직 생존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