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6.25 전쟁의 격전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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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이 발발한 지 벌써 66년입니다. 당시 북한군은 치밀한 계획하게 기습적으로 남침을 시작했고,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던 한국군을 속전속결로 밀어 부치면서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고, 한달 만에 낙동강 전선에 이르렀지만, 끝내 적화통일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 땅 곳곳의 격전지에서 치러진 전투의 역사가 그 이유를 고스란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1950년 7월 5일 오산 죽미령 전투는 유엔군의 참전을 알리는 시발점이자 북한군과 유엔군 사이 최초의 교전으로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북한군의 남침 이틀 후 유엔 안보리는 유엔군의 참전을 결정했고, 미국은 유엔군의 일원으로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제8군 산하 24사단 21연대에 속한 스미스 부대를 한국에 급파했습니다. 스미스 부대는 7월 1일 C-54 수송기 편으로 부산에 도착하여 곧바로 전투에 투입되었습니다. 대대 규모인 스미스 부대는 T-34 전차를 앞세우고 물밀듯 밀려오는 북한군을 맞아 6시간 15분 동안 북한군 150여 명을 사살하면서 분전했지만 중과부족으로 퇴각했습니다.

스미스 부대는 540명의 병력 중 약 200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는 손실을 입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인 7월 5일부터 8일까지 충북 음성군 감우재에서는 신속하게 남하한 북한군 제15사단과 이를 저지하기 위해 나선 한국군 제1사단 11연대 사이에 격전이 벌어졌습니다. 네 차례에 걸쳐 벌어진 전투에서 한국군은 북한군 2,700여 명을 사살하고 170여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박격포, 차량, 기관총 등을 노획했습니다. 이 전투는 6.25전쟁이 시작된 이래 첫 번째로 울린 승전보였습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인해 한국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는데 좀 더 많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한국 국민의 뇌리 속에 가장 강하게 남아 있는 전투는 낙동강 방어선 전투입니다. 북한군은 전쟁도발 후 한달 만인 7월말에 남한의 90%를 점령했으며, 한국에게 있어 남은 곳은 왜관에서 마산과 포항으로 이어지는 낙동강 방어선뿐이었습니다. 한국군은 왜관에서 동해안으로 이어지는 방어선을 그리고 유엔군은 왜관에서 진해만에 이르는 서쪽 방어선을 맡아 사투를 벌였습니다.

8월 15일까지 부산까지 점령하여 적화통일을 완성하라는 김일성 주석의 명령을 받고 있던 북한군은 8월초부터 12개 보병사단과 1개 전차사단을 투입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려 했으나 한국군과 유엔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야 했습니다. 대구 북방에서 백선엽 장군이 이끄는 한국군 제1사단과 유엔군이 북한군 3개 사단을 물리친 다부동 전투는 전사에 길이 빛나는 승전이었습니다. 8월 16일 미 공군의 B-29폭격기들이 2차 대전 이후 최대규모의 폭격을 통해 왜관 전면에 포진해있던 북한군 주둔지역을 초토화시킨 것은 낙동강 전투의 대미였습니다.

이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역사적인 인천 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은 패주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군과 유엔군은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10월 1일 38선을 돌파하여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했으며, 11월 21일에는 혜산진을 점령하고 압록강에 도달하여 자유민주 통일을 눈앞에 두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30만 명의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통일의 희망은 무산되고 한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후퇴해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잊을 수 없는 격전지로는 장전호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1950년 11월 27일 장전호 인근에 주둔한 미 해병 제1사단은 수적 우세를 앞세운 중공군과 맞닥뜨려야 했습니다. 무기와 차량 그리고 의약품까지 얼어 붙는 혹한 속에서 중공군은 인해전술을 앞세우고 미 해병 제1사단을 공격하여 장전호 동쪽에 주둔한 미 제7사단을 고립시켜 궤멸시키려 했지만, 미군은 숱한 어려움과 희생을 감내하면서 중공군을 물리쳤습니다. 이 전투를 통해 중공군의 남하는 지연되었고 덕분에 한국군, 유엔군, 20만 명의 피란민 등이 흥남을 통해 남쪽으로 철수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다시 서울이 공산군의 손에 들어가고 한국군과 유엔군이 반격을 하면서 전쟁은 중부지역에서 교착되었는데, 그 과정에서도 지평리 전투, 설마리 전투, 가평지구 전투, 백마고지 전투 등 수 많은 격전이 치러졌습니다. 지평리 전투는 1951년 2월 강원도 홍천의 지평리에서 소수의 미군과 프랑스군이 중공군의 남하를 막아낸 전투이며, 설마리 전투는 1951년 4월 21일 임진강 부근에서 영국군 1개 중대가 6시간 동안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버티다가 대부분 전사하거나 실종된 참혹한 전투였습니다.

가평지구 전투는 4월 23일 호주군, 뉴질랜드군, 캐나다군 등으로 구성된 유엔군 제27사단이 압도적 숫자의 중공군을 격퇴하여 중공군의 남하를 지연시킨 유명한 전투였습니다. 호주는 지금도 매년 6월이 되면 ‘가평의 날’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평강, 철원, 김화 지역의 백마고지는 1952년 10월 휴전협상이 진행되던 도중 시작된 중공군의 대공세에 맞서 한국군 제9사단이 7차례나 고지의 주인이 바뀌는 격전을 벌인 곳으로 유명합니다. 그럼에도 죽미령, 지평리, 다부동, 백마고지 등을 제외하고도 이 땅에는 수 많이 격전지들이 널려 있습니다. 6.25 전쟁 1,129일 동안 치러진 전투들은 그 말고도 무수히 많으며, 조국을 수호하다가 산화한 용사들의 혼백들은 지금도 피로 물들었던 격전지들을 굽어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