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제2차 연평해전 13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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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하 소령, 한상국 중사, 조천형 중사, 황도현 중사, 서후원 중사, 박동혁 병장… 6월이 되면 다시 생각나는 이름들입니다. 150톤급 참수리 고속정(PKM) 357정의 함장과 승조원들로서 2002년 6월 29일 제2차 연평해전에서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꽃다운 젊음을 서해 바다에 바치고 산화한 6명의 영웅들입니다.

2002년 6월 당시 한국은 월드컵 열기로 뜨거웠습니다. 한국팀이 강호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연달아 격파하고 4강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북한군은 이 열기를 시샘하듯 6월 중순부터 서해에서 위기를 조성하기 시작했습니다. 13일 북한 경비정이 북한어선 단속을 구실로 북방한계선(NLL)을 7km나 침범했고, 20일에도 어선 1척과 전마선 2척에 어부로 가장한 정찰국 요원들을 태워 북방한계선의 남방 15km까지 내려 보내 한국군의 대응을 떠보려 했습니다. 한국 고속정이 나포하려 하자 칼과 도끼로 극렬하게 저항했습니다. 북한 경비정의 북방한계선 침범은 27일과 28일에도 있었습니다.

운명의 날인 6월 29일은 한국에서 월드컵 3, 4위전인 한국과 터키 간의 축구경기가 열린 날입니다만, 이른 아침부터 북한측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북한의 130톤급 상하이급 초계정과 215톤급 경비정 684정이 남하하기 시작했고 10시경에는 북한의 388정이 북방한계선을 침범하자 고속정 2척으로 구성된 한국의 고속정 233편대가 대응기동을 시작하고 한국어선들의 조업을 중단시켰습니다. 이어서 북한의 684정도 북방한계선을 넘었고, 이에 한국의 232편대가 가세하여 대응기동을 시작했습니다. 232편대는 고속정 357정과 358정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연평도에 주둔하는 한국군은 K-9 자주포를 전투배치하고 253편대도 가세하여 차단기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차단기동이란 적의 선박이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도록 항로를 가로막는 것으로 경고사격이나 격파사격에 비해 매우 비적대적인 대응방식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때 북한의 684정이 한국의 357정에 대해 갑판에 탑재된 대전차포와 함포로 일제사격을 가했습니다. 한국의 357정과 358정이 응사했지만, 선제공격을 받은 357정은 선체에 파공이 생기고 화재가 발생하여 침몰하기 시작했습니다. 357정은 358정의 예인으로 돌아오던 도중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현장에는 한국의 256편대와 253편대가 추가로 도착했고, 1200톤급 초계함(PCC)인 제천함과 진해함이 도착하여 북한의 684정에 대해 격파사격을 실시했습니다. 684정은 대파되어 화염에 휩싸인 채 388정의 예인을 받아 북쪽으로 퇴각하고 이로서 전투는 종료되었습니다.

이후 357정 승조원들의 영웅적인 전투수행이 알려지면서 국민에게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 윤영하 소령은 최후의 순간까지 전투를 지휘하다 함교를 겨냥한 적의 포탄에 전사했고, 한상국 중사는 함체 인양시 조타실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는데, 끝까지 수동키를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조천형 중사와 황도현 중사도 적의 포탄에 쓰러지는 순간까지 발칸포 방아쇠를 놓지 않았고, 서후원 중사는 방탄벽이 없는 갑판 위에서 응전하다가 전사했습니다. 의무병 박동혁 병장은 무수히 많은 적탄을 맞고 후송되었으나 치료중 사망했습니다. 부정장 이희완 중위는 정장을 살리려다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는 부상을 입었습니다.

제2차 연평해전은 한국군에게 적어도 두 가지의 교훈을 되새겨 주었습니다. 첫째, 북한과의 합의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1991년 기본합의서를 통해 남북은 현재 관할하고 있는 해역을 경계선으로 존중한다고 합의했지만, 북한은 서해 북방한계선을 무력화시키려는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특히, 도발의 주역을 담당한 북한의 684정은 1999년 제1차 연평해전때 한국 고속정을 향해 선제공격을 했다가 오히려 한국 고속정과 초계함의 정확한 응사를 받아 반파되고 함장이 전사했던 그 배였습니다. 즉, 3년전 패전을 앙갚음하기 위해 당시 갑판장을 새 선장에 임명하여 2002년 제2차 연평해전을 도발한 것인데요, 이런 북한에게 합의란 사실상 휴지조각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또 한번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둘째, 당시 해군에게 지시된 한국정부의 교전수칙이 너무나도 안일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김대중 정부는 남북화해 분위기를 의식하여 먼저 사격하지 말 것과 확전시키지 말 것을 지시했는데, 이에 따라 해군은 경고신호-시위기동-차단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이라는 5단계 교전수칙을 지켜야 했습니다. 근접 시위기동이나 차단기동이라는 것은 적함의 함수에 우리 선박의 옆구리를 노출하는 것으로서 적이 먼저 사격을 하면 영락없이 당해야 하는 매우 위험한 교전수칙이었는데, 제2차 연평해전에서 북한군은 이를 철저히 이용했습니다. 이후 해군의 교전수칙을 대응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이라는 3단계로 바꾼 것은 매우 당연한 조치였습니다.

대한민국에서 6월은 호국의 달입니다. 6월이 되면 온 국민은 6.25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 그리고 각종 활동을 통해 나라를 위해 희생한 영웅들을 추모합니다.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러도 대한민국은 2002년 제2차 연평해전에서 전사한 6명과 부상당한 19명의 호국 영웅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