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19일은 역사적인 9.19 공동성명이 서명된 지 10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2005년 9월 베이징에서는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4차 6자회담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송민순 대한민국 외교통상부 차관보, 크리스토퍼 힐 미합중국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 우다웨이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 부부장,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 사사에 켄이치로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 국장, 알렉세예프 러시아 외무부 차관 등 6개 회원국의 대표들이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힘든 협상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9월 19일 마침내 합의가 도출되어 공동성명 형식으로 발표되었습니다.
공동성명 제1조에서 북한은 한반도의 검증 가능한 비핵화를 달성하기 위해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계획을 포기하고 조속한 시일 내에 핵무기비확산조약(NPT)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안전조치에 복귀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미국은 한반도에 핵무기를 두고 있지 않으며 핵무기 또는 재래식 무기로 북한을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확인했습니다. 대한민국도 자국 영토 내에 핵무기가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하고 1992년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에 따라 핵무기를 접수 또는 배비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제2조는 미국과 북한 간 그리고 북한과 일본 간 관계를 정상화하는데 합의했음을 천명했습니다. 제3조에서는 한국,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5개국이 북한과의 경제협력을 강화하고 에너지를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한국은 2백만 KW 전력공급을 제안한 2005년 7월 12일자 제안을 재확인했습니다. 제4조에서는 회원국 모두가 동북아의 항구적인 평화와 안정을 위해 노력하고 별도의 포럼에서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를 협상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이런 내용들을 포함한 6개조의 공동성명이 발표되자 국제사회는 이를 북핵 문제의 해결이라 믿고 환영했습니다. 특히, 2004 장성급회담에서 남북한이 서해충돌방지 및 상호비방 포기에 합의했고 2005년 7월에 정동영 당시 통일부장관이 200만kw 전기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하는 등 남북관계가 양호했던 시절이어서 한국의 기대감은 더욱 컸습니다.
하지만 기대는 곧바로 실망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이듬해인 2006년 10월 북한은 첫번째 핵실험을 강행함으로써 9.19 공동성명을 사문화시키고 말았습니다. 북한은 미국이 방코델타아시아은행(BDA)의 북한계좌를 동결하는 조치를 취했기 때문이라고 밝혔지만, 미국이 불법자금을 동결한 것이 북한의 9.19 공동성명 위배를 위한 명분이 될 수는 없으며, 핵실험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다년간 준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방코델타아시아 건이 없었다면 북한이 9.19 공동성명을 준수했을 것이라는 주장에도 설득력이 없습니다.
이러한 실망은 이후에도 반복되었습니다. 2007년에는 미북 간 2.13 합의를 통해 북핵의 불능화와 검증에 합의하고 2008년에는 북한이 영변 원자로의 냉각탑을 폭파하여 더 이상 플루토늄을 생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히기도 했지만, 이듬해인 2009년 북한은 제2차 핵실험을 강행했습니다.
2012년에도 미국은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의 뒤를 이은 김정은 정권과 지루한 협상 끝에 2.29 합의를 도출하고 북한으로부터 더 이상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지만, 그해 12월 북한은 광명성 3호라는 미명하에 사실상의 장거리 탄도미사일 실험을 실시했고 2013년 2월에는 제3차 핵실험까지 강행했습니다.
6자회담 전체과정을 놓고 보면 몇차례에 걸쳐 의미있는 합의가 도출되기도 했지만 그 합의란 북한에게 있어서 핵개발을 계속하면서 잠시 국제비난을 피하는 구실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즉,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북한이 번번이 합의를 위배하면서 핵무기 개발을 계속하는 상황에서 국제사회가 6자회담에 대한 기대감을 접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돌이켜 보건대, 9.19 공동성명은 2003년 시작된 6자회담이 최초로 생산한 포괄적 합의로서 북핵 해결을 위한 모범답안이라고 할만했습니다. 이 합의가 제대로 이행되었더라면 오늘날 북한의 모습은 지금과는 많이 달라져 있을 것입니다. 지금쯤 국제사회는 핵무기를 앞세워 동족을 위협하기보다는 대화와 협력을 통해 남북한의 공동번영을 추구하는 북한, 그러면서도 국제사회의 책임있는 일원으로서 활발하게 국제교류에 임하고 있는 개방된 북한의 모습을 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북한의 모습은 이와는 딴판입니다. 지금 국제사회가 목도하고 있는 것은 궁핍에 시달리는 주민을 제쳐둔 채 많은 돈을 들여 핵무기 개발에 여념이 없는 북한, 잊을만하면 미사일을 쏘고 대남 무력도발을 자행하는 북한, 그리고 2006년이래 유엔 안보리가 채택한 다섯 개의 대북제재 결의에 의해 철저하게 고립당하고 있는 북한일 뿐입니다. 그래서, 한국 국민은 아쉽고 씁쓸한 심정으로 9.19 공동성명 10주년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