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장진호 전투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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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9일 서울의 국립현충원에서는 국가보훈처가 주최한 장진호 전투영웅 추도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장진호 전투는 1950년말 함경남도 장진호 부근에서 미 해병 제1사단이 연합군을 흥남으로 철수시키기 위해 영하 30도의 혹한 속에서 다섯 배가 넘는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벌였던 전투입니다.

추도식은 박승춘 보훈처장을 비롯한 전현직 정부인사, 전현직 군 인사, 보훈단체 대표들,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를 위시한 여야 지도자들, 이상훈 전 국방장관과 김재창 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을 위시한 예비역 군인 등 6,000여 명의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으며, 장진호 전투의 생존자인 필립 D. 셔틀러 미 해병 예비역 중장과 존 E. 베슬리 장진호협회장이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장이 수여하는 감사패를 받았습니다. 희생된 장병들에 대한 한국국민의 감사와 추모의 뜻이 고스란히 담긴 감사패였습니다.

장진호 전투는 미 해병 제1사단과 육군 제7사단의 일부 병력이 중공군 제9병단 휘하의 7개 사단과 맞붙어 싸운 전투로서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장진호 전투 이전의 상황은 북한군에게 매우 불리했습니다. 북한군은 6월 25일 기습적인 남침으로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한달 만에 남한 국토의 90%를 점령하는 개가를 올렸지만, 9월 15일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보급로가 차단당하면서 패주하기 시작하여 장진호 전투 직전에는 압록강까지 후퇴한 상태였습니다.

동부전선을 따라 북진하던 미제 10군단, 미 해병 제1사단, 미 8군단 소속 제7사단 등은 패주하는 북한군을 좇아 개마고원 지역의 장진호 방면으로 진격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김일성 정권을 구하기 위한 중공군의 참전이 개시되었습니다. 동부전선에서 선봉에 선 중공군 부대는 제9병단이었는데 이 무렵에는 제9병단 휘하의 12개 사단, 서부전선의 제 13병단 휘하의 18개 사단 등 이미 30만 명 이상의 중공군이 북한에 넘어온 상태였으며, 이후에도 중공군은 물밀듯이 압록강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연합군은 승리를 눈앞에 둔 상태에서 중공군의 참전으로 후퇴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공군 제9병단은 미 제10군단을 포위 섬멸하고 원산을 점령하고자 했으며 그 과정에서 정예부대로 알려진 미 해병 제1사단을 궤멸시킴으로써 미국에게 타격을 가하고자 했습니다. 미 해병 1사단은 인천상륙작전의 주역이었고 맥아더 장군의 계획에 따라 10월 2일 원산에 상륙하여 한반도의 동북쪽에서 북진을 하고 있었습니다.

일단 후퇴를 결정한 연합군은 당장 제10군단을 무사히 함흥으로 철수시켜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미군은 해병대 및 해군 13,500명과 7사단 소속 4,500명의 병력으로 포위망을 좁혀오는 중공군 제9병단 휘하 7개 사단 6만 명과 맞서야 했습니다. 장진호 지역에 병력을 집결시킨 중공군은 11월 27 밤부터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인해전술을 앞세운 이틀에 걸친 공격으로 미군은 교통로와 통신을 두절당했고 장진호 서편에 배치되어 있던 7사단은 궤멸적 타격을 입었습니다.

중공군의 포위망에 갇힌 해병 제1사단의 운명도 풍전등화와 같았습니다. 맥아더 장군이 트루만 대통령에게 원자탄 사용을 허락해줄 것을 요청한 것도 이 무렵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해병 제1사단은 숱한 전사자를 내면서 사투를 벌였고 결국 12월 10일과 11일 사이에 흥남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전투로 연합군은 동부전선에서 중공군의 남하를 2주 이상 지연시켰고 그 덕에 제10군단과 7사단의 나머지 병력이 무사히 흥남으로 철수했으며, 12월 23일 역사적인 흥남 철수작전을 감행할 수 있었습니다.

이 작전은 193척의 선박이 동원되어 10만 명의 병력을 철수시킴으로써 성공적으로 완료되었습니다. 당시 10군단의 알몬드 사령관은 남한으로 가기 위해 흥남부두에 밀려나온 피난민들을 보고 선적되었던 군사장비들을 다시 내리고 피난민들을 태우라고 명령했는데, 그리하여 20만 명의 피난민이 무사히 남쪽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감동적인 역사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서명되는 순간까지 지루하게 이어졌고 숱한 생명들이 산화했습니다.

장진호 전투는 6.25 전쟁 역사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미 해병 1사단은 4천여 명의 전상자를 기록했고, 약 4천 명이 동상으로 신음해야 했습니다. 비전투원 손실도 6,200명에 달했습니다. 1사단 병력 중 걸어서 흥남으로 철수한 병력은 6천명 정도였습니다. 중공군 9병단의 손실은 이보다 훨씬 더 커서 2만5천명의 사상자와 1만 명의 동상환자를 기록했습니다. 대한민국이 장진호 참전자들을 추모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은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켜준 진정한 영웅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