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김영삼 대통령의 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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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22일 김영삼 전 대한민국 대통령이 향년 88세로 서거했습니다. 장례는 26일 국가장으로 엄수되었습니다. 한국의 정치풍운아로서 지난 2009년 서거한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한국의 민주화를 이끌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패혈증과 심부전증으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후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 했습니다. 영결식은 첫눈이 내리는 가운데 국회에서 거행되었으며, 영결식이 끝난 후 김 전 대통령의 시신은 국민의 애도 속에 상도동 사저와 기념도서관을 거쳐 국립 서울 현충원에 도착하여 대통령 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돌이켜 보건대, 김영삼 전 대통령만큼 파란만장한 정치일정을 보낸 정치지도자는 흔치 않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1927년 거제도에서 멸치어장 사업을 하는 부유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나 26세에 국회의원에 당선된 풍운아였습니다. 하지만 이후의 정치일정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1961년 박정희 장군이 군사쿠테타를 통해 집권했을 때 젊은 정치인 김영삼은 강하게 저항했고, 이후 박정희 대통령이 한국의 산업발전과 경제개발을 견인하는 중에도 김 전 대통령은 고난 받는 야당 정치인의 길을 택했으며, 1979년에는 유신체제에 반대하다가 의원직을 박탈당하는 비운을 겪기도 했습니다.

군의 정치개입에 대한 반대를 정치적 소신으로 여겨온 김 전 대통령은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당하고 전두환 장군이 집권하는 과정에서도 민주화를 외치며 힘든 투쟁을 이어갔습니다. 1982년에는 23일에 걸친 단식투쟁을 통해 전두환 정부에 항거했습니다. 1987년 전두환 정부의 임기가 끝나고 민주화의 봄이 찾아왔을 때에는 선거에 의해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는 기회를 잡았지만, 같은 야당 지도자로서 함께 민주화 시대를 이끌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는 바람에 1987년 대통령 선거는 야권표가 분산된 가운데 전두환 대통령이 지목한 여당의 노태우 후보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김 전 대통령은 집권의 꿈을 버리지 않았고 그 기회는 곧바로 찾아 왔습니다.

야당이 국회의석의 과반수를 차지한 상황에서 여당은 여소야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합당을 제안했고, 김 전 대통령이 이를 수락함으로써 여당 정치인으로 변신하게 됩니다. 마침내 여당의 대통령 후보가 된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2년 선거에서 정치적 동지이자 라이벌인 김대중 전 대통령을 꺾고 대통령에 오르게 됩니다. 이어서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됨으로써 두 야당 지도자는 차례대로 집권하면서 한국정치의 민주화를 완성하는 대업을 쌓게 됩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개혁 대통령이었습니다. 집권 동안 김 전 대통령은 군내부의 정치지향적 조직들을 과감히 정리했고, 금융실명제와 부동산 실명제를 도입하여 가명이나 차명을 사용한 재산은닉을 원천적으로 차단함으로써 경제의 투명화를 실현했습니다. 또한, 김 전 대통령은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군사반란 및 부정부패 혐의로 구속했습니다. 이는 군의 정치개입에 대한 응징이기도 했으며, 동시에 두 전직 대통령이 집권기간 동안 수천억 원의 부정재산을 축적한 사실을 세상에 알리고 공개적으로 징벌한 결단이었습니다. 1990년대 중반 한국경제를 강타한 세계 금융위기에 너무 무기력하게 대처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민주화와 개혁을 주도한 김영삼 대통령의 업적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김 전 대통령이 행한 수많은 결정 중에 잊을 수 없는 또 하나는 1994년 미국의 대북 군사행동을 만류한 것입니다. 당시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는 북한의 특정 핵시설을 파괴하는 ‘수술적 공격’ 계획을 외부에 흘렸는데 김영삼 전 대통령이 한승주 당시 외교부장관을 미국에 급파하여 만류에 나선 것입니다. 이후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과 함께 미북간 협상이 타결되어 1994년 10월에는 역사적인 제네바핵합의(Agreed Framework)가 서명되었습니다. 이 무렵 남과 북도 카터 전 대통령의 중재를 받아들여 사상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하게 됩니다. 하지만,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김영삼-김일성 정상회담은 무산되었으며, 이후 북한이 핵개발을 멈추지 않음에 따라 제네바핵합의도 사문화되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김영삼 전 대통령은 파란만장한 정치일정을 보내면서도 매 순간 결단하는 지도자의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한국 국민은 김구 선생과 같은 민족지도자들에 의한 강인한 민족정신을 이어올 수 있었고, 이승만 대통령과 같은 지도자에 의해 건국을 이루고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으며, 김영삼·김대중이라는 지도자가 있었기에 민주화를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제 김 전 대통령이 투쟁할 필요도 걱정할 것도 없는 좋은 세상에서 편안히 안식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