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현봉학 박사 동상 제막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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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19일 서울역 앞 연세세브란스 빌딩에서는 한국의 쉰들러로 불리는 고 현봉학(玄鳳學 1922~2007) 박사의 동상 제막식이 거행되었습니다. 현봉학 박사는 6,25 전쟁 중에 흥남 철수작전에서 수만 명의 피란민을 구한 영웅입니다. 이날 해병대 군악대의 장중한 연주 속에 거행된 제막식에는 현 박사의 딸인 에스더 현과 헬렌 현 그리고 현 박사의 간청을 수락하여 피난민을 태우기로 결단했던 미 제10군단 에드워드 알몬드 사령관의 외손자인 토머스 피거슨 미 육군 예비역 대령, 10군단 포니 대령의 손자인 존 포니와 증손자 벤 포니 등이 미국에서 건너와 참석했습니다.

이 자리에는 리퍼트 주한 미 대사, 박승춘 국가보훈처장, 이상훈 해병대 사령관, 홍영재 연세대 의대 총동창회장,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 등 500여 명의 국내외 인사들이 참석하여 현 박사를 기렸습니다. 한국정부는 에스더 현에게 국가유공자 증서를 수여했고, 헬렌 현, 토마스 피거슨, 존 포니, 벤 포니 등에게도 감사패를 전달했습니다. 해병대는 이들에게 보국훈장 통일장과 해병대 핵심가치상을 수여했습니다. 현 박사의 딸들은 “우리 가족 모두는 아버지의 업적을 영원한 자긍심으로 품고 살겠다”고 화답했습니다. 제막식 후 축하만찬 행사에는 흥남 철수작전에서 마지막으로 피난민을 태우고 떠난 메러디스 빅토리호에서 태어난 5명의 신생아 중 두 명인 손양경 씨와 와 이경필 씨가 참석하여 이채를 띄었습니다.

현봉학 박사는 1922년 함경북도 성진에서 태어나 스물 두살이었던 1944년에 서울로 유학하여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하고 모교에서 병리학 강사로 연구활동을 하던 중에 6.25 전쟁을 맞았습니다. 영어에 능통했던 현 박사는 해병대 통역관으로 참전하여 마산 진동리 전투, 통영 상륙작전 등 여러 전투에서 한국군과 미군 간의 교량역할을 담당했고, 이후에는 제10군단 고문관으로 파견되었습니다. 1950년 9월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집히면서 한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을 밀어내고 북진을 시작했습니다.

한국군과 유엔군은 10월 1일 38선을 통과하여 10월 19일에는 압록강과 두만강에 도달하여 통일을 목전에 두었지만, 수십만 명의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 개입하면서 전세는 다시 뒤바뀌게 됩니다. 중공군의 압도적 수적 우세에 밀려 한국군과 유엔군은 눈물을 머금고 후퇴를 결정했고, 1951년 1월 4일 서울은 다시 공산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10군단과 함께 북진했던 현 박사도 함경남도 지역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고립되었고, 유엔군은 흥남부두를 통해 한국군 제1군단과 미군 제10군단의 장병 10만 명과 군수물자 35만 톤을 철수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1950년 12월 15일에서 25일까지 저 유명한 흥남 철수작전이 전개된 것입니다.

당시 흥남 앞바다에는 철수작전에 동원된 선박들이 가득 찬 상태였고, 흥남부두는 공산치하를 벗어나 남쪽으로 가기를 원하는 십만 명의 피란민들이 배를 타려고 아우성을 치는 아비규환의 현장이었습니다. 현봉학 박사와 한국군 1군단장인 김백일 장군은 알몬드 사령관에게 피난민을 태워달라고 애원했고, 결국 알몬드 장군은 빅토리아호에 실었던 무기들을 모두 내리고 그 자리에 1만 4천 명의 피난민을 태워 28시간의 항해 끝에 1950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날에 이들을 거제도 장승포항에 하선시켰습니다.

빅토리아호는 최대 2천 명을 태울 수 있는 화물선이었지만, 이날 1만 4천 명을 승선시킴으로써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태우고 항해한 배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습니다. 당시 빅토리아호 선상에서는 5명의 신생아가 태어났는데, 한국말을 모르는 미군들은 신생아들에게 김치1, 김치2 라는 식으로 임시 이름을 붙였습니다. 제막식날 축하만찬 행사에 참석했던 손양경 씨가 김치 1이었고 이경필 씨가 김치5였습니다.

전쟁 후 현 박사는 미국 펜실베니아대에서 의학 석사와 박사를 취득하고 버지니아 의대, 콜롬비아 의대, 필라델피아 의대 등에서 병리학 및 혈액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1992년에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임상병리학회가 주는 세계적 권위의 이스라엘 데이비슨상을 수상합니다. 한국에서도 아주대학교 의과대학 임상병리학과 과장으로 봉사했습니다. 오늘날 한국인들은 현 박사를 “한미 양국을 오가면서 봉사의 일생을 살았던 분”으로 기억하고 있으며, 현 박사의 동상에는 “자유와 인류애의 표상, 영원히 기억합니다”라고 글이 새겨졌습니다.

현봉학 박사는 한국의 쉰들러였습니다. 오스카 쉰들러는 독일의 사업가로 1939년부터 폴란드에서 법랑용기 제작회사를 운영하면서 유태인 포로들을 노동자들로 사용했는데, 1944년 소련군의 진격으로 독일군이 서쪽으로 후퇴하면서 유태인 수용자들은 죽음의 수용소인 이우슈비츠로 이송되었습니다. 하지만, 쉰들러는 자신의 군수공장을 이전한다는 구실로 데리고 있던 1,200명의 유태인들을 빼돌려 구출했고, 이후 종전 시까지 자신의 재산을 이들을 보호하는데 소비했으며, 1974년 향년 66세로 사망했습니다. 그가 죽자 그로 인해 목숨을 부지했던 유태인들은 그의 시신을 예루살렘의 기독교 묘지에 안장했고, 이들의 후손들은 오늘날에도 이 묘지를 찾고 있습니다. 쉰들러는 유태인들이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시몬산에 묻힌 유일한 나치독일의 사업가입니다. 흥남철수 작전으로 남쪽으로 넘어와 대한민국 국민이 되어 살고 있는 사람들은 현봉학 박사를 ‘한국의 쉰들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