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아]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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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민주여성동맹 6차대회가 진행되었습니다. 5월에 진행된 당대회 이후 청년동맹, 직맹에 이어 여성동맹 대회가 열린 것입니다. 33년만에 열린 이번 대회에서는 여맹의 명칭을 사회주의여성동맹으로 바꾸고 동맹을 김일성·김정일주의화하는 것을 총적 과업으로 제시했습니다.

북한에서는 일찍부터 여성들은 혁명의 한쪽 수레바퀴를 밀고 나가는 중요한 사명을 지니고 있다고 하면서 여성들의 역할을 중시해왔습니다. 해방직후 남녀평등권법령을 발포하여 여성들을 봉건적 구속에서 해방했을 뿐 아니라 여성들의 조직인 조선민주여성동맹을 내왔습니다.

그러나 지난 기간 여맹은 여성들의 이익을 옹호하고 여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당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여성들을 당의 노선관철에 동원하는데 주력했습니다. 여맹을 조직한 것도 당이었고 여맹을 움직인 것도 당이었습니다. 1970년대 여맹이 당 못지않은 위세를 자랑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여성들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김일성의 부인인 김성애가 여맹위원장으로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김성애가 김정일과의 권력투쟁에서 패하자 그것은 곧 여맹의 몰락으로 이어졌습니다. 여맹중앙위원회 성원들은 종파분자로 낙인 되어 숙청되었고 여맹 5차대회 이후 여맹조직은 급속히 축소되었습니다. 그 후 김일성이 사망하고 김성애가 정치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여맹은 거의 존재조차 없었습니다.

다시 여맹이 활기를 찾은 것은 1995년부터였습니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가족을 먹여 살리는 부담이 모두 여성에게 돌아왔습니다. 여성들은 월급도 배급도 타지 못하면서 직장에 출근해야 하는 남편을 대신하여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습니다. 여성들은 수십 킬로가 넘는 장사 짐을 지고 수십 리 밤길도 걸었고 돌밭이나 부대기를 일구어 가족이 먹을 식량을 생산했습니다. 집에서 돼지를 기르고 술과 두부를 만들었고 옷을 가공했습니다. 여성들은 보안원과 규찰대에 쫓기고 장사물건을 빼앗기면서 장사를 했습니다.

여성들의 이러한 헌신이 없었다면 북한은 결코 고난의 행군을 극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여성들의 역할을 외면할 수 없었던 김정일은 고난의 행군시기부터 여성들을 내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체제위기를 극복하는 데서 여성들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여성들이 직장을 그만두고 시장으로 나가기 시작하면서 여맹은 급속히 확대되었고 여성들이 경제권을 쥐다 보니 각종 사회동원에서 여맹조직이 힘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당에서는 여맹조직에 각종 건설과제와 동원과제를 맡기고 그들의 재력과 노력을 동원시켰습니다. 또한 여맹은 돌볼 사람이 없는 늙은이와 어린이를 사회적으로 돌보는 임무, 아이를 많이 낳아서 군대에 보내고 인민군대를 적극 원호하는 임무 등을 맡아 수행해야 했습니다. 김정은 역시 어머니의 날을 제정하고 여성간부를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여성들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북한여성운동의 역사가 보여주는 것처럼 당과 수령은 여성을 자신들의 체제유지를 위한 수단으로만 동원해왔습니다.

오늘 세계에서 여성의 지위는 급속히 높아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역사가 오랜 서방은 더 두말할 것도 없고 지난 시기 북한보다 남녀불평등이 더 심했던 남한에서도 여성들의 지위는 북한에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습니다.

여성들의 지위상승은 당과 국가가 마련해준 것이 아닙니다. 여성들이 스스로 자신의 자질을 높이고 스스로 조직을 만들어 여성들의 요구를 실현시켜왔습니다. 북한여성들도 불평등한 지위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의 힘으로 권리를 찾아야 합니다. 북한여성들은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