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려진 것처럼 쿠바혁명의 지도자였던 피델 카스트로가 11월 25일 타계했습니다. 쿠바에서는 카스트로의 장례를 국가적 행사로 치렀습니다. 9일간의 추모기간을 설정했고 카스트로의 유해는 나흘 동안 전국 900km를 순회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향이자 쿠바 혁명의 성공을 선포했던 곳인 '산티아고 데 쿠바'의 혁명광장에서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 등 중남미 좌파 정권 지도자들과 수십만 명 시민들과 작별 했습니다. 그러나 유골함 안치식은 룰라 전 브라질 대통령 등 이웃 나라 지도자 몇명과 가족들만 참석했고 비공개로 진행했습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오래 전부터 장기 집권한 지도자의 시신을 영구 보존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러시아의 레닌, 중국의 모택동, 베트남의 호지명, 북한의 김일성·김정일의 시신은 지금도 보존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카스트로의 시신은 고인의 유언에 따라 화장했습니다. 유해는 그가 평생 우러러 봤던 19세기 쿠바 독립영웅 호세 마르티의 무덤 앞에 있는 산타 이피헤니아 묘지에 안치되었습니다. 4.5m 높이의 단순한 원형 돌에 유해 안치실이 마련되었습니다. 그의 묘지 옆에는 1953년 7월 그와 함께 몬카다 병영을 습격하다가 숨진 반군 병사들의 묘가 있습니다. 그는 사망 후 함께 혁명을 한 전우들의 옆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독재자가 사망했을 때 새로 권력을 잡으려는 자는 그 제단 앞에서 자신이 후계자임을 선언하곤 했습니다. 고대 로마의 독재자였던 시저가 암살되었을 때에도 권력은 암살을 주도한 브루투스가 아니라 시신을 차지한 안토니우스에게 돌아갔습니다. 시신을 차지한 안토니우스는 로마시민들에게 시저의 처참한 시체를 공개하고 영웅을 사살한 자에 대한 민심의 분노를 부추기는 선동으로 브루투스를 제압하고 권력을 차지했습니다.
레닌이 사망하자 스탈린은 맨 앞에서 그의 영구를 멨습니다. 생전에 레닌은 스탈린을 크게 신임하지 않았고 사망 전에는 그를 해임하라는 지시까지 내렸습니다. 그러나 스탈린은 앞장서서 레닌의 관을 어깨에 걸치고 붉은 광장으로, 권력의 핵심으로 곧장 걸어 들어가 레닌이 남긴 권력을 차지했습니다. 레닌의 시신을 영구 보존하고 레닌 숭배가 자리를 잡도록 한 인물도 스탈린입니다. 그러므로 독일의 역사학자는 "무덤숭배는 과거를 담보로 미래를 장악하려는 산 자들의 권력 투쟁"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쿠바의 카스트로는 "나를 숭배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카스트로의 동생 라울 카스트로 현 국가평의회 의장도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피델 카스트로의 이름을 딴 거리나 건물, 기념물을 세우지 않겠다고 밝혔습니다.
카스트로에 대한 평가는 극에서 극으로 엇갈립니다. 카스트로의 죽음이 알려지자 미국 마이애미주에서 살고 있는 쿠바계 미국인들은 거리로 나와서 환호하며 축제를 벌였다고 합니다. 쿠바 내에서는 카스트로의 죽음에 대해서 슬퍼하는 사람들과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쿠바주민들은 카스트로가 실시했던 무상의료와 무상교육, 사회복지 정책 같은 것은 높게 평가합니다. 그러나 카스트로는 집권후반기인 1990년대 초반에 들어서면서 사회보장을 별수 없이 축소해야 했습니다.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가 집권한 이후로도 복지는 계속 축소되고 물가는 오르고 월급수준이 몹시 낮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에 대한 불만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쿠바는 미래가 있습니다. 쿠바는 카스트로에 대한 숭배를 포기함으로써 공산독재를 그만두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리고 우여곡절이 있겠지만 개혁개방정책이 더 확대 실시될 것이고 쿠바는 빠르게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이번 북한에서는 최룡해를 단장으로 하는 조문대표단을 직접 쿠바에 파견했습니다. 국제사회는 이에 대해 북한이 쿠바를 붙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독재를 부인한 쿠바와 독재를 옹호하는 북한은 미래의 동지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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