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남한의 법원에서는 1959년 간첩으로 몰려 사형당한 조봉암 선생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북한에도 잘 알려져 있는 조봉암 사건은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법살인' 중 하나로 꼽힙니다. 조봉암 선생은 1952, 1956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80여만 표, 200여만 표 등을 얻었을 정도로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맞선 유력한 야당 지도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1958년 1월 민의원 총선을 앞두고 간첩이라는 누명을 쓴 채 체포돼 1년 반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재판부는 "진보당은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거나 민주적 기본질서를 위배했다고 볼 수 없고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결성됐다고 볼 수 없다. 진보당의 통일정책도 북한의 위장된 평화통일론에 부수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간첩 혐의에 대해서도 "유일한 직접증거인 증인 양이섭의 진술은 일반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는 육군 특무부대가 증인을 영장 없이 연행해 수사하는 등 불법으로 확보해 믿기 어렵고 합리적인 의심 없이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최근 남한에서는 지난시기 군사정권하에서 잘못 판결되었던 사건을 재조사하고 바로 잡는 일이 꾸준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1975년 사형이 집행된 '인민혁명당' 사건도 무죄로 결정되어 피고인 8명의 유족이 낸 소송에서 "위자료 245억 원에 지연 이자 392억 원을 더해 총 637억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되기도 했습니다.
북한은 지난시기 남한의 군사정권하에서 정치적 목적으로 사건을 날조하는 데 대해 적극 비판해 왔습니다. 그러나 사실 북한에서 정치적 반대파 숙청은 남한을 훨씬 능가했습니다.
전쟁패배의 책임을 넘겨씌우고 남한파를 청산하기 위해 조작된 박헌영 이승엽사건, 연안파와 소련파를 제거하기 위한 8월종파사건, 갑산파 만주파를 청산하기 위한 67년 반당수정주의숙청사건, 후계세습을 보장하기 위한 94년 김동규 사건, 곁가지 청산 등 정치적 반대파를 청산하기 위한 사건이 줄을 이었습니다.
이러한 행태는 90년대에도 이어져 프룬제 아카데미사건, 6군단 사건, 사회안전부의 심화조 사건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정치적 사건들이 무수히 조작되어 사람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처형된 사람들은 사회주의나 북한체제를 반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조국의 광복을 위해 피 흘려 싸운 항일투사들이었으며 북한을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려고 나름대로 적극 노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조봉암선생은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 살 수 있는 정치운동을 한 것밖에 없다.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임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발전에 도움이 되기 바랄 뿐이다." 고 유언하였습니다.
조봉암선생과 같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오늘 남한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보장받는 선진적인 정치제도가 마련되었습니다. 지금 이 시각도 북한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김정일을 반대하였다는 죄 아닌 죄로 고통을 받고 있으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이 있어 앞으로 북한의 역사도 바뀌게 될 것입니다.
남한의 과거사 재평가가 보여주는 것처럼 역사는 공정합니다. 북한에 민주주의제도가 수립되는 날 북한주민들도 남한처럼 과거를 다시 평가할 것이며 이러한 사건을 조작한 당사자들에게 책임을 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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