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4일은 보천보전투 승리 기념일입니다. 북한에는 보천보전투를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북한에서 반간첩투쟁운동이 한창이던 1960년대에는 이 전투가 소년단원들의 간첩 잡은 이야기에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학교에 가던 아이들이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을 만났는데 아무래도 이상해보였습니다. 아이들은 수상한 아저씨에게 학교에서 보천보 전투에 대해 알아오라고 했는데 그에 대해 좀 알려달라고 졸랐습니다. 아저씨는 “6.25전쟁 때 그런 전투가 있었지”라고 해서 간첩이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보천보전투는 일제통치시기 빨치산부대가 국경지역인 양강도 갑산군 보천면 보전리 주재소를 습격한 전투입니다. 순사 네댓명 밖에 없던 주재소를 습격하는 전투로 군사적으로 주목할 만한 전투는 아니었습니다. 보천보전투가 주목받게 된 것은 정치적 의의 때문이었습니다. 1937년 당시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나라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던 사람들 가운데 핵심인사는 다 붙들려가고 나머지 사람들도 산산이 흩어졌습니다. 사람들은 독립에 대한 희망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시기에 진행된 보천보전투는 사람들에게 광복의 희망을 안겨주었습니다. 당시 가장 큰 신문의 하나였던 동아일보는 비적 소탕소식을 싣는다는 구실로 보천보전투에 관한 보도를 냈을 뿐 아니라 연이어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소개했습니다. 보천보전투 소식은 국내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김일성의 이름도 그 때부터 유명세를 타게 되었습니다.
해방 후 북한에서 다시 보천보전투가 유명해지게 된 것은 조기천의 시 때문이었습니다. 재능 있는 시인이었던 조기천은 보천보전투를 주제로 한 장편서사시 백두산에서 김장군을 찬양했습니다. “절망이 잦아든 이 거리에/별천지의 화원인 양 화해에 불꽃이 나붓기고/재생의 열망을 휘끗어 올리며 화광이 춤추는데/밤바다같이 웅실거리는 군중/높이 올라서 칼 짚고 웨치는 절세의 영웅 김일성장군!/ ≪동포들이여!/저 불길을 보느냐?/조선은 죽지 않았다!/조선의 정신은 살았다!/조선의 심장도 살았다!/불을 지르라-원쑤의 머리에 불을 지르라!≫ 시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장면은 미술작품으로도 형상되었고 그에 대한 소설도 나왔습니다.
북한 주민들은 화광이 충천한 보천보 시내에서 김일성이 손을 높이 들고 인민들 앞에서 연설하는 장면을 사실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날 밤 김일성은 가림천 황철나무 밑에서 전투지휘를 했을 뿐 시내에 들어가지도 않았습니다. 보천보 시내에서는 군중집회도 없었고 당연히 김일성의 멋진 연설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보천보에 가면 경찰서와 황철나무 사적지는 있지만 김일성이 연설한 장소는 없습니다.
북한주민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이것뿐이 아닙니다. 반일운동에 참가하던 초 시기 김일성은 이름조차 없었습니다. 김일성은 정의부계통의 조선혁명군에서 변절자로 알려진 이종락의 부하로 반일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초기 혁명 활동시기 김일성이 한별로 칭송받은 일이 없습니다. 북한주민들이 부르는 “조선의 별”이라는 노래도 초기 혁명 활동시기 혁명시인 김혁이 지은 노래가 아니라 당에서 1980년대에 만들어 낸 노래입니다. 김일성이 처음 반일투쟁에 나섰을 때는 이름 없는 평범한 전사였습니다. 김일성은 혁명하는 과정을 통해 성장했습니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위인으로 될 수 없습니다.
항일무장투쟁시기 김일성 못지않게 잘 싸운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광복의 날을 보지 못하고 희생되었습니다. 그러나 북한지도부는 다른 사람들의 업적은 무시하거나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김일성의 업적만 과장하고 조작했습니다. 외부의 역사학자들은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은 있는 그대로 서술해도 충분히 찬양받을 수 있는데 부풀리다보니 오히려 비난거리가 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북한지도부는 역사를 위조한 죄가 주민들에게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개방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위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