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7일은 전승기념일로, 북한은 이 날을 세계에서 가장 강대하다고 하는 미국과 싸워 승리한 역사적인 날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제와 싸워 이길 수 있은 기본 요인은 수령의 현명한 영도라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은 다릅니다. 북한역사치고 왜곡되지 않은 것이 별로 없지만 가장 많이 왜곡된 것의 하나가 조국해방전쟁입니다. 6.25전쟁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중국인민지원군이지만 북한은 이를 축소하고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전쟁 전 북한군은 남한군보다 훨씬 우세했습니다. 미국은 1949년에 남한에서 철수했고 1950년 1월 발표한 아시아 작전권 지역에서 남한을 제외시켰습니다. 북한지도부는 방금 2차 대전을 겪은 미국이 3차 대전이 발발하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도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조선전쟁에 개입했고 전쟁 상황은 바뀌었습니다. 북한은 압록강까지 밀리자 중국에 지원군을 요청했습니다.
지원군이 조선전쟁에 참전한 것은 1950년 10월 25일입니다. 이는 3년에 걸치는 전쟁기간 6개월을 제외한 나머지 전쟁은 중국이 치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초기 지원군의 병력은 30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더 보충되어 75만 명의 지원군이 조선전쟁에 참전했습니다. 전쟁시기 북한군 병력은 26만이었습니다. 즉 조선인민군의 3배에 달하는 지원군이 전쟁에 참가한 것입니다. 지원 병력까지 합하면 120만의 지원군이 참가했다고 합니다. 지원군의 참전으로 미국은 북한에서 밀려났고 전선은 38도선 부근에서 고착되었습니다. 그 때 인민군대가 방어한 지역은 1211고지를 비롯한 동부전선의 일부였고 나머지 전선의 대부분은 중국군이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지원군 참전 이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전선사령관은 팽덕회였습니다.
북한은 김일성장군이 아니라 팽덕회의 지휘 밑에 전쟁을 치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문가들은 조선전쟁을 미국과 중국 간의 전쟁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김일성은 그 때 고산진에 들어가 있으면서 전선을 지휘한 것이 아니라 당중앙위원회를 열고 전쟁실패의 책임을 누구에게 전가할 것인가를 모색했습니다. 비록 패전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은 전쟁의 어려운 상황을 이용해서 북한에서 강력한 정치세력이었던 남로당을 몰아내고 자기의 정치적 지반을 더욱 굳건히 했습니다. 남로당 주역들이었던 박헌영, 이승엽 등은 미국의 간첩으로 몰려 숙청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조국해방전쟁은 탄생한지 3년밖에 안 되는 독립국가가 강대국 미국을 이기고 승리한 전쟁이라고 주장해왔고 그 승리를 마련한 것은 김일성장군이라는 신화를 지속적으로 주민들에게 주입해왔습니다.
북한에서 현대사는 조선노동당 역사연구소에서 만듭니다. 그리고 누구도 그에 대해 다르게 연구하거나 의문을 제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6.25전쟁은 북한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지만 지금까지도 미국을 침략전쟁을 일으킨 당사자라고 규탄하는 글이 버젓이 노동신문에 게재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천학살만행사건도 북한 내 공산당세력과 반공산당세력 간의 무차별적인 싸움의 결과였지만 미국의 만행으로 규정하고 계급교양자료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왜곡된 역사적 사실로 오랫동안 교육받다 보니 의심하는 북한주민도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왜곡된 역사는 북한에서는 통할 수 있어도 국제사회에서는 용납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북한당국의 삼엄한 정보통제 속에서도 나날이 더 많은 주민들이 역사적 진실을 알아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