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려진 것처럼 중국에는 인민들로부터 존경받는 두 명의 지도자, 모택동과 등소평이 있습니다. 모택동은 인민을 조직해서 아편전쟁 이후 100여 년간 계속된 내전을 종식하고 통일된 중국을 세운 건국자입니다. 그는 토지개혁을 실행해서 농민들에게 땅을 나누어주었고 선진적인 남녀평등정책을 실시했습니다. 모택동은 6.25전쟁 때 북한에 중국인민지원군을 보내 준 은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이후 광란적이며 현실 불가능한 정책인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을 주도하여 수천만의 아사자를 내고 수많은 혁명가와 지식인들을 숙청했으며 중국의 발전을 가로막은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등소평은 모택동의 잘못된 정치로 인해 가난과 정치적 혼란으로 어지러워졌던 중국을 재건한 지도자입니다. 등소평은 사회주의 노선에 대해 그 누구도 의문을 제기할 수 없었던 그 시기에 “흑묘백묘론” 즉 자본주의 경제방법을 도입할 데 대한 노선을 내놓았습니다. 많은 반대와 동요가 있었지만 그는 개혁개방정책에서 후퇴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소련이나 동유럽처럼 급하게 서두르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이끈 개혁개방정책은 성공하여 1979년 270달러였던 중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은 지난해 6800달러로 늘었습니다. 개혁개방 전에는 북한보다 더 가난한 나라였던 중국은 오늘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우뚝 섰습니다.
최근 중국 인민일보는 두 지도자의 말년을 비교하면서 “가정은 지도자의 성패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라고 분석한 기사를 게재했습니다. 신문은 “각종 자료로 볼 때 모택동은 말년에 고독했던 반면 등소평은 그렇지 않았다. 등소평이 위대한 업적을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은 강한 인내심뿐 아니라 화목한 가정이 그를 뒷받침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습니다.
등소평의 아내는 힘들 때나 좋을 때나 항상 그의 곁에 있었습니다. 문화대혁명 때 많은 자녀들이 부모를 비판하고 등을 돌렸지만 그의 다섯 자녀는 그를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베이징대에 재학 중이었던 그의 맏아들은 아버지를 비판하라는 시달림을 피해 건물 4층에서 뛰어내려 평생 반신불수가 됐지만 끝까지 아버지를 지지했습니다. 반면 모택동은 혁명의 대장정 속에서 가족을 차례로 잃었습니다. 모택동의 첫째 부인은 국민당 세력들에게 지독한 고문을 당한 뒤 처형됐고, 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모안영은 조선전쟁에 참전했다 전사했습니다. 모택동의 바람기를 참지 못해 집을 나간 것으로 전해지는 둘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둔 3남 3녀는 리민을 빼고 대부분 어린 시절에 연락이 끊겼습니다. 셋째 부인 장청은 숙청되었습니다. 모택동이 남긴 가족은 큰딸 리민이 유일했습니다.
그러나 지도자의 가족애가 모두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김일성은 평소에 가족을 몹시 사랑했습니다. 황장엽의 회고에 의하면 그는 동지들보다 가족친척들에게 더 의지했다고 합니다. 동지보다 가족친척을 더 믿었기 때문에 그는 정권을 아들에게 세습했고 그것이 전통화되어 3대 세습으로 이어졌습니다.
반대로 모택동은 그는 자기 가족을 특수하게 취급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조선전쟁에서 희생된 아들의 시신을 중국에 들여오는 것조차 거부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신을 가져오지 못하는데 아들만 특수로 취급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만약 모택동이 가족에 집착했다면 결코 아들을 조선전쟁에 내보내지 않았을 것이고 말년에 정권을 아들에게 세습하려고 시도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랬다면 등소평의 등장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등소평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중국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