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아 칼럼] 스탈린에 대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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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2일, 스탈린의 딸인 스베들라나가 미국에서 85세로 삶을 마쳤다고 합니다. 스탈린은 생전에 슬하에 아들 2명 딸 1명을 두었습니다. 아들 중 한 명인 야코브는 2차대전 시기 나치에게 붙잡혔고 스탈린이 독일 장군과 아들의 교환을 거부하면서 집단 수용소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다른 아들인 바실리는 러시아에서 40세에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했습니다.

스베들라나는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의 사랑을 가득 받으며 자랐으나 스탈린이 스베틀라나의 첫사랑이었던 유대인 영화감독을 시베리아(씨비리)로 보내며 부녀 관계가 틀어졌다고 합니다. 스탈린이 죽자 그는 아버지의 성을 버리고 어머니의 성을 따랐습니다. 그는 냉전이 한창이던 1967년에 러시아에서 오랫동안 부인해왔던 자신을 표현하고 싶었다는 이유로 미국으로 망명해서 그곳에서 생을 보냈습니다.

자기의 수령을 내세우기 위해 다른 나라의 지도자에 대한 평가에 인색한 북한이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과 함께 스탈린을 국제노동계급의 탁월한 수령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스탈린을 레닌의 위업을 빛나게 계승한 수령의 후계자, 사회주의 건설과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탁월한 수령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평가는 북한과 다릅니다. 스탈린이 2차 대전 시기의 역할이나 소련의 공업화와 경제 발전에 기여한 업적을 인정하면서도 정치적으로 철저한 정적 숙청, 지어는 동지들마저 반혁명 혐의로 숙청하여 자기의 지위를 다진 독재자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옛 소련이 붕괴한 뒤 모스크바 체카의 문서가 공개되고 역사가들은 스탈린 치하의 러시아에서 발생한 전체 사망자 수를 처음으로 사실에 기초해 파악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1937년에 35만 3천 명이, 1938년에 23만 9천 명이 처형당했습니다. 그리고 1944~1948년에 소수 민족 강제 이주 과정에서 14만 명이 죽었습니다. 또한 강제 노동 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의 숫자가 1933년 2백50만 명에서 1953년에 5백50만 명으로 늘어났고, 수용소 내 사망률은 일반주민들에 비해 5~9배나 높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의 강제 집단화로 인한 기근 때문에 5백만 명 이상이 숨졌습니다. 역사가들은 스탈린 체제가 매우 유혈적인 체제였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스탈린의 딸인 스베틀라나는 미국에서 살면서 '친구에게 보내는 스무 통의 편지' 등 회고록을 네 권 썼습니다. 그는 책에서 수백만 명을 노동 수용소에 보낸 스탈린과 공산주의 지도자들을 비난했습니다. 또 "세상에는 자본주의자와 마르크스주의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믿게 됐다"고 썼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스베틀라나의 인물평은 "매우 단순하고 무례하며 잔인한 사람"이었습니다.

스베틀라나는 아버지의 그늘 밖에서 살려 했지만, 아버지의 망령은 그의 일생을 사로잡았습니다. 스베틀라나는 2007년 자신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사람들은 나에게 '스탈린의 딸, 스탈린의 딸'이라고 말한다. 마치 내가 권총을 들고 다니며 미국인을 쏠 것처럼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또 '아니다. 그는 이곳에 왔고 미국인이 됐다'고 말한다. 이때 나는 내가 다른 사람을 해칠 폭탄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북한체제를 스탈린 체제와 닮았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탈린은 권력을 아들에게 물려주지 않았습니다. 스탈린은 2차 대전 승리를 위해 아들을 바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