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아] 화합과 평화의 상징 넬슨 만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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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진 것처럼 12월 5일 넬슨 만델라가 향년 95세를 일기로 타계하였습니다. 그의 장례식은 세계 91개국의 정상과 10여 명의 전직 국가수반이 참석한 세계적인 행사로 치러졌습니다.

넬슨 만델라는 남아프리카에서 용서와 포용, 화해와 관용 정책으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350여 년 동안 지속된 남아공의 백인통치를 끝장내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습니다. 남아프리카의 한 부족장의 아들로 태어난 넬슨 만델라는 인종차별을 청산하기 위해 투쟁하다 체포되어 종신형을 언도받고 27년간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그는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감옥에서 석방된 후 역사상 처음으로 치러진 일반선거를 통해 남아프리카의 첫 대통령으로 추대되었습니다.

만델라가 대통령으로 되던 당시 남아프리카의 정치정세는 매우 복잡했습니다. 흑인 정권으로의 교체가 확실시되자 백인들은 소요사태나 정치적 보복 등을 두려워했습니다. 백인 극단주의자들의 반항도 컸고 흑인도 종족별 분쟁으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만델라는 집권 뒤 과거사 문제해결에서 ‘잊지는 않지만 용서한다’는 원칙을 내걸었습니다. 그는 대통령에 당선된 뒤 백인들에 대한 정치보복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라의 미래를 위해 백인들의 지식·기술과 관료체계와 자본을 끌어안아야 한다고 믿었고, 때로는 흑인들의 반발을 무릅써가며 백인 세력을 끌어안았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그렇게 고통을 준 백인들을 정권에 받아들였습니다. 백인정권의 마지막 대통령 프레데리크 데클레르크를 부통령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일했습니다. 만델라는 한때 백인지배의 상징이었던 남아공 럭비 국가대표팀의 상의를 입고 럭비월드컵 결승전을 참관하면서 백인들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만델라는 욕심이 없는 정치가였습니다. 그는 종신 대통령직을 제의받았고 헌법상 대통령 재임이 가능했으나 대통령 임기가 끝나자 정권을 떠났습니다. 그는 대통령이 아닌 손자들의 할아버지로 살기를 원했습니다. 퇴임한 후 에이즈 퇴치운동을 비롯한 사회적으로 중요한 일을 스스로 맡아하며 말년을 보냈습니다. 그는 대통령직을 떠났으나 흑인들뿐 아니라 백인과 유색인종 모두에게 칭송받는 진정한 영웅으로 남아프리카의 정신적 지도자로 되었습니다.

넬슨 만델라를 추모하는 뜻 깊은 자리에는 고인이 바라던 대로 정견과 신앙의 차이를 극복하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남아프리카의 백인과 흑인은 물론, 서로 대립되어 있는 국가의 지도자들인 미국의 오바마와 쿠바의 라울 카스트로, 짐바브웨 무가베 대통령, 유럽의 대통령들이 모여 함께 그를 추모했습니다. 추모장은 만델라가 평소에 그토록 념원했던 화합의 축제장으로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적이 없었습니다.

<뉴욕타임스>는 만델라 추모 기사에서 "끔찍한 고통을 겪은 뒤에도 어떻게 증오심을 통제할 수 있느냐"라는 문제를 가지고 그를 취재한 이야기를 실었습니다. 기자가 질문하자 그는 "질문 같지도 않다는 듯"한 태도로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증오는 마음을 짓누른다. 생각을 방해한다. 지도자는 증오를 담아둘 여력이 없다". 신문은 "만델라는 조국을 분열시킨 인종차별에 대한 증오심을 진정으로 초월한 것으로 보인다, 만델라는 20세기 전 세계를 통틀어 마하트마 간디, 마틴 루터 킹과 비견될 만한 위대한 지도자이며, 정치인이 아니라 위대한 정치가였다고 추모했습니다.

지금 북한에서 광란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숙청과 너무도 대조되는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