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아] 독재체제와 숙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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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북한에서 총정치국장 황병서, 국가안전보위부장 김원홍이 실각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아직 숙청이냐 철직이냐 엇갈리고 있지만 그들이 정치무대의 일선에서 사라진 것은 분명합니다. 김정은 등장이후 총참모장 이영호, 고모부 장성택, 인민무력부장 현영철 등 고위급 간부들에 대한 강도 높은 숙청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고위급간부의 숙청은 독재자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습니다. 소련의 반혁명분자로 알려진 트로츠키, 부하린은 모두 레닌과 함께 러시아 10월 혁명을 이끌었던 볼쉐비크 지도부의 최고위 간부들이었습니다. 트로츠키는 10월 혁명의 주역이자, 붉은 군대의 창시자로서 레닌의 후계자로 유력했으나, 스탈린과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뒤 당에서 제명되고 소련에서 추방당했으며 멕시코에서 피살되었습니다. 러시아 최고의 경제학자였고 레닌이 국가원수 후보로 지명했던 부하린은 1937년 1월에 국가전복혐의로 체포되어 트로츠키주의자로 사형 당했습니다. 중국의 류소기도 모택동이 추진했던 대약진 운동의 실패 이후 2대 국가주석으로 올랐으나 모택동의 문화대혁명 반격으로 권력에서 물러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트로츠키나 부하린, 류소기 모두 정권수립과 유지에 큰 공을 세운 사람으로 본연의 임무에 충실했습니다. 그들이 숙청된 진짜 이유는 집권자에게 그들의 존재가 권력유지에 대한 불안감을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북한도 마찬가지입니다. 북한주민들이 미국의 고용간첩으로 알고 있는 박헌영은 조선공산당 총비서로 김일성과 거의 동급인 북한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은 전쟁패배로 인한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그리고 남노당파를 견제하기 위해 그를 숙청했습니다. 1956년 8월 종파로 알려진 연안파, 소련파는 스탈린 개인숭배비판 분위기로 권력유지에 불안을 느꼈기 때문에 숙청했습니다. 김일성은 1967년 권력을 아들에게 넘겨주는데 장애로 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연안파, 소련파 숙청 때 자신을 열렬히 옹호해 나선 세력이었던 만주파를 숙청했습니다. 김일성은 숙청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기의 동지였던 그들에게 간첩, 종파분자, 수정주의자의 감투를 씌었습니다.

북한에서 김일성의 절대 권력이 형성된 이후 정권은 안정되었고 따라서 한동안 대규모 숙청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1990년 후반기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자 농업상 서관히가 농업파탄의 책임을 지고 처형당했고 심화조 사건으로 중앙당 제1부부장이었던 문성술을 비롯하여 많은 간부들이 간첩으로 몰려 숙청당했습니다. 심화조 사건은 사건조사 책임자였던 채문덕을 처형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습니다.

권력에 대한 욕구는 올라가면 갈수록 더 높아집니다. 권력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간부들은 독재자에게 충성을 바칩니다. 그러나 충성을 바친다고 해서 높은 지위에 올라간다고 해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독재체제하에서 살아남는 길은 독재자에게 납작 엎드리거나 독재자가 감히 건드릴 수 없는 권력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체제에서 독재자를 견제할만한 권력을 구축할 수 없습니다. 납작 엎드리는 것도 만능의 수단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독재자의 의심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독재자의 특성에 따라 대처방법이 차이나기 때문에 능동적으로 처신하는 길밖에 없다고 합니다.

민주주의 정치체제는 권력을 분산시킴으로서 잔악하고 무자비한 숙청을 원천적으로 차단합니다. 물론 민주주의정치 체제하에서도 억울하게 실각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직위를 잃을 뿐 목숨을 잃지 않으며 자신이 구축한 명망이나 추종자를 완전히 빼앗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회복할 기회도 있습니다. 민주주의 정치제도는 북한주민들만이 아니라 간부들에게도 절실히 필요한 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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