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훈 칼럼] 5·16 혁명 50주년에 즈음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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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은 남한에서 5·16 군사혁명이 일어난 지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육군소장이던 박정희 장군과 그의 부하들은 장면 민주당 정부를 무너뜨리고 국가재건최고회의를 구성해서 국가적 난제를 해소하기 위해 대폭적인 개혁조치를 단행하고 나라의 흐름을 바꿔놓았습니다.

당시 남한의 시대상황은 극도의 혼란과 부패로 얼룩져서 나라의 앞날을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습니다. 정치, 경제적으로 부정부패가 만연한 것은 물론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구호 아래 무분별한 통일운동이 난무하기도 했습니다. 혁명을 주도했던 박정희 장군을 비롯한 군인들은 군복을 벗고 민간인으로서 남한의 근대화와 경제발전의 선두에 서서 우리 민족이 5,000년 동안 겪었던 가난의 굴레에서 남한을 구해냈습니다.

5·16 혁명은 민주적인 질서를 부정하는 거사였습니다. 지금도 역사가들은 이 점에 대해서 비판적입니다. 그러나 극도의 혼란을 헤매던 당시 남한의 사정을 생각한다면 군사혁명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데 대해서도 의견이 일치합니다. 예를 들어, 1960년에 남한에서 일어난 4·19 학생의거의 주역으로서 당시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이었던 한 원로는 5·16 군사혁명이 남한의 근대화와 경제발전에 기여한 공을 인정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5·16 혁명이 발생하던 때에 남한에서 유행하던 '사상계'라는 잡지가 있습니다. 이 잡지의 발행인인 장준하 선생은 민주투사로도 유명한 분입니다. 이 분이 혁명이 발생한 직후인 6월호에 5·16 혁명을 지지하는 글을 썼습니다.

장선생은 "5·16 혁명은 우리들이 육성하고 개화시켜야 할 민주주의의 이념에 비추어 볼 때는 불행한 일이요 안타까운 일이지만 위급한 민족적 현실에서 볼 때는 불가피한 일"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리고 "절정에 달한 국정의 문란, 고질적인 부패, 마비 상태에 빠진 사회적 기강 등 누란의 위기에서 민족적 활로를 타개하기 위해 최후의 수단으로 일어난 것이 다름 아닌 5·16 군사혁명"이라고 말했습니다.

지도층의 부패와 분란으로 나라가 어렵던 시절에 남한은 혁명이란 극단적인 선택을 해서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 놓았습니다. 혁명세력들은 민주주의의 후퇴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국가경제 발전에 매진해서 혁명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습니다. 5·16 혁명이 일궈놓은 경제발전의 토대 위해서 남한의 민주화가 꽃을 피웠고 이제는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것입니다.

혁명을 위해서는 수 십 년간 길들여진 타성을 깨고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민족의 역사와 세계 역사의 흐름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력이 요구됩니다. 더 나아가 혁명의 정당성과 역사의 평가에 대한 신념과 자신감이 그 바탕에 깔려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