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지난 6월 6일 전쟁에서 순국한 용사들을 기리는 남한의 현충일에 남북 당국간 대화를 공식 제의했습니다.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즉 조평통 대변인은 특별담화를 통해 6·15를 계기로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이산가족 상봉, 7·4 공동성명 기념 등 포괄적인 남북대화를 하자고 제의한 것입니다. 또한 이번 제의가 “위임에 따라” 이뤄졌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김정은의 의중이 실렸다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회담 시기와 장소까지 남측에 일임한 이번 북한의 제안은 놀라움 자체였습니다. 바로 전날만 해도 북한은 적십자회를 동원해서 북한으로 북송된 9명의 탈북 청소년들이 남한에 의해 납치되었다는 거짓선전을 늘어놓으며 남한을 비난했었기 때문입니다.
헌데 남한도 북한 못지않게 통 크고 신속하게 화답했습니다. 북한의 대화제의가 있은 지 두 시간도 못되어 북한의 제안을 환영한다는 정부입장을 발표했고, 당일 오후 7시에는 남한의 통일부장관이 6월 12일 서울에서 남북장관급회담을 갖자고 제의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7일부터 판문점 연락사무소의 대화채널을 열라고 북측에 요구했습니다. 이에 대해 북한은 7일 오전 판문점 연락채널을 열겠다면서 9일 개성에서 당국간 실무접촉을 하자고 제의했습니다.
남북대화를 위한 작업이 마치 순풍에 돛단 듯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는 느낌입니다. 남한의 새 정부는 이미 출범 이전부터 소위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에 입각해서 남북대화를 추진하겠다는 입장이었지만, 북한의 경우에는 이번에 최고지도부의 결단에 의해 대남정책을 크게 바꾼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변화가 진정한 변화인지 아니면 당면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일시적인 변화인지는 좀 더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겠지요.
이 시점에서 우리는 남북대화의 역사적 교훈 한 가지를 되새겨야 할 것 같습니다. 북한이 대화를 제의할 때는 항상 뒤에서 뭔가 다른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겁니다. 이번에 북한이 공동기념을 제의한 7·4 남북공동성명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1972년에 이 선언을 체결할 즈음 남과 북은 통일의 열기로 뜨거워져있었습니다. 6·25 전쟁 이후 최초로 양측의 적십자 대표단이 서울과 평양을 방문했고, 양측 최고지도자의 위임을 받은 대표들이 정치적 합의를 이끌어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시점에 김일성은 남침용 땅굴을 파도록 전방 부대에 지시를 내렸다는 사실이 귀순자들에 의해 밝혀졌습니다. 북한의 대화제의를 기쁜 마음으로 수용하지만 동시에 경계감을 늦춰서는 안된다는 것이 남북대화의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냉엄한 교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