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29일은 제2연평해전이 발발한 지 10년이 되는 날입니다. 북한 매체인 우리민족끼리는 이 사건을 미국과 남한이 6‧15시대의 흐름을 막기 위해 계획한 군사도발이라고 주장했는데, 그야말로 어불성설이고 적반하장입니다. 오늘 저의 논평에서는 제2연평해전의 전모를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2002년 6월 29일 남한 전역은 월드컵 열기로 들떠있었습니다. 남한과 일본이 공동으로 개최한 한‧일 월드컵에서 남한이 터키와 3‧4위 결정전을 갖는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아침 서해에서 남북한 해군이 충돌해서 남한 해군 여섯 명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3‧4위 결정전 시작에 앞서 전사자들의 명복을 비는 묵념을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당시 남한은 김대중 정부가 북한 정권을 도와주는 대북정책을 펴던 시점입니다. 북한이 주장하는 소위 ‘6‧15 시대’가 한창 무르익던 시점이지요. 북한은 해전이 발생한 직후 우발적인 사고였다는 내용의 통지문을 보내왔고, 남한 당국은 북한의 말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전사자가 안치된 분향소를 찾지도 않았고, 부상자들이 입원한 병원도 방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3‧4위 전이 끝난 뒤 바로 일본 동경으로 날아가 결승전 경기를 관람했지요. 이후에도 김 대통령은 제2연평해전에 관련된 행사에 참가한 적도 없고, 희생자를 찾는 적도 없습니다.
10년이 지난 지금 제2연평해전이 김정일의 직접 지시에 의한 계획적인 선제공격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우리 속담처럼, 남한에서 큰 잔치가 있을 때마다 재를 뿌려대던 그의 속성을 감안할 때, 김정일의 사주로 제2연평해전이 발발했다는 것이 결코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88 서울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1987년에 대한항공기를 폭파한 주범도 김정일이었습니다.
2002년 2월 초 김정일은 서해함대사령부를 방문하고, 3년 전에 있었던 제1연평해전에서 패배했던 8전대장을 복권시켰습니다. 5월 초에는 8전대 전 함정에 기름을 가득 채우라는 이례적인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6월 13일 북한군이 ‘발포’라는 말이 들어간 교신을 했고, 6월 27일에는 명령만 내리면 발포하겠다는 교신이 포착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틀 후에 제2연평해전이 발발한 것입니다.
당시 김대중 정부의 안이한 태도로 인해 선제공격을 받았다고 주장한 용기있는 남한 군인은 전역되었고, 사망한 중사의 부인은 남한이 싫다며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추종한 노무현 정부에서도 묻혀 있던 이 사건이 10주년을 맞이하면서 새로이 조명되고 있는 겁니다. 희생자 가족들은 정부가 책무를 소홀히 해서 자식들이 희생되었다며 당시 남한의 국방부장관과 함참의장 등 12명을 법원에 고발했습니다.
북한이 선전에 열을 올리는 ‘6‧15 시대’가 남한에서는 국가안보가 실종된 ‘굴욕의 시대’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북한이 진정으로 남북관계개선을 원한다면 더 이상 6‧15 시대를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