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훈 칼럼] 등소평 개혁의 핵심은 '인민 신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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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기회 있을 때마다 북한의 현 체제는 중국식 개혁·개방을 할 수 없다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세습으로 정권을 잡은 김정일과 김정은이 개혁·개방을 위해서 자신들의 권력기반인 선대의 유산을 비판하는 것이 불가능한 세습의 구조적인 한계 때문입니다. 반면에 중국은 등소평이란 한 위인이 길잡이가 되어 변화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오늘 논평에서는 중국식 개혁·개방의 바탕에 중국 인민들에 대한 등소평의 무한한 신뢰가 자리하고 있었다는 점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모택동과는 혁명동지이고 주은래와는 프랑스 유학 동창인 등소평은 문화대혁명 기간에 모든 직책을 박탈당하고 시골로 쫓겨난 후, 채소재배와 노동을 하며 7년을 보냅니다. 1974년 복권되었지만 1976년에 서거한 주은래에 대한 애도사가 문제가 되어 다시 추방되었습니다. 그는 1977년 다시 북경에 입성한 후 '4인방'과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하고, 중국의 새로운 역사를 여는 대장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등소평은 모택동의 업적을 '7: 3'으로 정리했습니다. 잘한 게 70%이고 잘못한 게 30%라는 말입니다. 사실 이 비율은 모택동이 스탈린의 업적을 평가하면서 사용했던 말인 데, 등소평이 거의 같은 방식으로 모택동의 공과를 평가한 것입니다. 신처럼 추앙받던 모택동의 과오를 용감하게 인정한 것은 새로운 중국의 문을 여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후 등소평은 크게 세 분야에서 개혁·개방을 추진했는데, 구체적으로, 시장경제를 받아들이고, 중앙정부의 결정 권한을 하부 기관으로 대폭 이양했으며, 중국사회를 대외적으로 개방했습니다. 그가 이런 혁명적인 변화를 시작하면서 굳게 믿었던 것은 바로 중국인민들의 자질이었습니다. 등소평은 중국 인민들의 가슴속에 잠재해있는 경제적 욕구와 사업가적 기질이 모택동의 교조적 사상과 이념에 가려서 빛을 보지 못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중국 인민들의 천부적인 경제발전의 기질이 발휘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주자는 것이 등소평 개혁·개방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등소평의 판단은 정확했습니다. 가장 개인주의적이고 이해타산이 심한 중국인들이 사회주의 국가를 이룩한 것이 세계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라는 말도 있지요. 지구촌 어느 곳이나 심지어 시골구석엘 가도 허름한 중국식당이 있을 정도로 전 세계에 퍼진 화교들은 중국이 제2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하기 전부터 세계경제의 한 축을 형성했습니다. 결국 한족의 민족적 성향을 꿰뚫어 본 지도자의 명철한 안목이 오늘날 중국의 번영을 이뤄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북한의 우리 동포들도 중국인 못지않은 장사 기질과 근면성, 성실함으로 유명합니다. 이는 6·25 전쟁 와중에 고향을 떠나 남한에 자리 잡은 분들이 대부분 크게 성공한 사실로도 증명이 됩니다. 안타까운 것은 북녘 동포들의 가슴속에 살아있는 천부적인 기질이 독재체제의 억압과 공포 때문에 제대로 펴보지도 못한 채 시들고 만다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