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칼라튜] 감시와 정치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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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말 공산주의 독재 체제가 무너지기 전 동유럽 나라들 중 북한과 상황이 가장 비슷했던 나라는 북한에서 '로므니아'라 불리는 루마니아였습니다. 과거 제가 루마니아 공산주의 독재체제 아래서 사는 동안 가장 답답했던 것은 가족 외에는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학교 친구나 이웃사람, 심지어는 길 건너편에 사는 이웃집 할머니마저도 비밀 경찰의 끄나풀일 수 있기 때문에 부모님은 제게 가족 외에는 누구도 믿지 말라고 늘 당부했습니다.

외국 라디오 방송을 듣거나 가족끼리 정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공산 독재 체제를 비판하게 되는데, 그 때는 늘 누군가 문 앞에 있는지 없는지 확인부터 해야 했습니다. 당시 교회에 다닐 수는 있었지만 들키면 누군가 학교 선생님께 알릴 수 있어 교회에 들어갈 때는 아무도 얼굴을 자세히 알지 못하게 모자를 쓰곤 했습니다. 그런 심리는 공산주의 독재체제하에 살아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느낄 수 있습니다. 조국인 루마니아를 떠난 지 오래 됐어도 저는 지금도 전화 통화를 할 때면 무의식적으로 누군가 엿듣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당시 루마니아에서 공산주의 질서와 독재자의 권력을 유지하는 핵심 기둥은 일반 경찰 보다는 밀고자와 '세큐리타테(Securitate)'라 불린 '국가 안전 보위부,' 즉 비밀 경찰이었습니다. 누구든 루마니아의 공산주의 체제나 지도자 차우셰스쿠의 적으로 고발되면 어두운 지하실에서 악명 높은 비밀 경찰에게 무수한 구타와 고문을 받았습니다. 아마 당시 고문에 못 이겨 희생된 사람이 수 천명은 될 것입니다.

제 개인적 경험담을 하나 말씀 드리자면, 지난 70 년대 후반 언어학자이신 저의 어머니는 프랑스의 수도인 빠리 (파리)에서 열리는 국제 언어학 회의에 참가해달라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어쩐 일인지 어머니는 여권 발급을 신청한 후 여권 발급이 되지 않아 프랑스에 갈 수 없었습니다. 그 때는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나중에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된 후 씁쓸해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린 나이였던 저는 어머니가 프랑스에 초청받아 간다니까 너무 흥분한 나머지 동네 친구들에게 자랑을 했는데 그걸 누군가 비밀 경찰에 고자질했던 것입니다. 이 밀고자는 샘이 났는지, 아니면 지식인 혐오증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비밀경찰에 내 어머니가 프랑스로 망명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려 어머니의 프랑스 행을 막았던 것입니다.

요즘 루마니아 정부의 관련 기관에 신청만 하면 과거 비밀 경찰의 행적과 기록을 열람할 수 있기때문에 원하기만 하면 35 년 전 제 어머니를 고발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습니다. 사실 어머니와 상의해 관련 기록을 찾아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에 와서 그 옛날 밀고자가 누군지 신경 쓰고 싶지 않았고, 그럴 시간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내 가족 가운데 누군가 비밀 경찰의 고문에 의해 희생된 사람이 있었다면 사정은 달랐을 것입니다.

2010년 10월 세상을 떠난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는 10년전 미국을 방문하면서 "북한의 현 상황은 과거 루마니아 공산주의 독재체제보다 10배는 더 심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북한의 상황은 냉전시대에 동유럽 공산주의 독재국가 중 독재자 개인숭배, 정치 탄압과 인권유린이 가장 심했던 루마니아보다도 훨씬 더 심합니다.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진 1989년 12월 루마니아 인구는 2천300만명이었습니다. 그 당시 루마니아 비밀 경찰 요원수는 1만1천여명이었습니다. 현재 북한의 인구는 약 2천400만명입니다. 북한 국가안보 요원 수는 냉전시대의 루마니아 비밀 경찰보다 20배나 더 많습니다. 국가안전보위부 5만명, 인민 보안부 21만명, 보위 사령부는 1만명이나 됩니다.

공산주의 시대에 루마니아 비밀 경찰의 밀고자수는 50만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인민반' 제도에 의해 훨씬 더 많은 북한 주민들이 친척과 이웃을 감시하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주민들을 심하게 탄압하고 감시하는 북한에서는 반대로 사회적 응집력이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도 믿지 못하는 사회이다보니 하나로 뭉치기란 근원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북한에서 권력 세습을 바탕으로 하는 김씨 일가에 반대하는 반체제 인사들이 생겨나기가 냉전 시대 때 동유럽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게 현실입니다. 하지만 악랄하기가 북한의 김씨 일가에 못지 않았던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정권도 결국 동유럽 전체를 휩쓸었던 공산주의 몰락의 큰 흐름을 피해가지 못한 점을 감안하면 북한 내부에서도 감시와 고발, 정치탄압의 거대한 사슬을 끊을 동력이 생겨날 거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