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말쯤 되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9월초의 개학을 위해 준비하기 시작합니다.보통 9월에 새 학년이시작되는데, 호주, 뉴질랜드나 남한에서는 2,3월에 새 학년이 시작돼기 때문에 9월에는 새학기가 시작됩니다. 세계 곳곳에서 모든 학생들이 여름 방학이 끝나고 9월을 새로운 시작과 희망의 달로 맞이합니다.
저는 개학날을 생각하면 여러 가지 추억들이 떠오릅니다. 냉전시대에 북한과 상황이 가장 비슷하던 동유럽 나라, 북한에서 '로므니아'라 불리는 루마니아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1학년부터 대학교 1학년1학기까지 니콜라에 차우체스쿠 공산주의 독재하에서 자랐습니다.
공산주의 독재 국가이던 루마니아에서 독재자는 '계급이 없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루마니아 정부의 목표라고 선언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의 인권을 지키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노력, 능력과 교육 수준에 따라서 공평한 기회를 주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사실 그것은 민주주의 사회와 자유시장경제의 기본입니다.
그러나 소련의 지배력을 받은 다른 동유럽나라들처럼 루마니아의 공산주의 정부는 모든 사람들의 인권을 유린하면서 모든 사람들을 탄압하고 모든 사람들을 무차별히 가난하게 만드는 것을 공평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대다수 루마니아 사람들이 인권 탄압과 경제위기에 의한 식량 부족과 전력난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고 살았음에도 공산당 간부들의 생활 수준은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계급이 없는 사회에서 신분은 대학을 졸업 한 사람들과 대학을 다니지 못한 사람들로 나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에 입학하는 것은 루마니아 학생들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대학 입학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좋은 고등학교에 입학해야 했고, 명문고등학교를 다니면서도 2학년을 마친 후 3학년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어려운 자격 시험에 합격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루마니아 학생들은 개학을 하면 쉽지 않은 시험 때문에 많은 고민을 해야 했습니다. 물론 시험이 모든 학생들의 고민거리가 되었지만, 공산주의 독재체제하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루마니아 학생들의 생활 또한 매우 어려운 실정이었습니다. 루마니아 경제 위기에 의해 정전이 잦아지자 밤늦게 책상위에 있는 촛불을 키고 숙제를 하던 기억이 납니다.
또 추운 겨울에 학교 중앙 난방이 작동하지 않아 겨울옷을 입고 장갑을 끼고 책상에 앉아 수업을 받았던 기억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대학교 입학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무조건 열심히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입시 준비에 여유가 없었어도 이를테면, 루마니아 공산당 역사와 독재자이던 니콜라에 차우체스쿠의 공산주의 이론을 포함한 정치경제학 수업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물론 그러한 과목의 목적은 학생들을 교육시키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을 새뇌시키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저의 세대가 차우체스쿠 독재 시대를 겪은 어려움보다 저의 부모님 세대가 1950년대에 겪은 어려움이 훨씬 더 사악했습니다. 루마니아는 제2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 소련의군사발에 짓밟혀 공산주의 국가가 된 후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전쟁이전에 활발하던 루마니아의 경제를 국유화 시키면서, 또 외화, 농산물, 식품, 석유, 석탄과 다른 원료를 전쟁 보상으로 소련으로 보내면서 루마니아의 경제는 심한 위기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루마니아의 젊은이들과 아이들도 식량 부족과 전력난 때문에 어렵게 살았습니다.
1950년대 루마니아 학생들은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고생한 것뿐만 아니라, 스탈린주의식 인권 유린과 정치 탄압에 의해서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당시 소련이 임명한 공산당 간부들은 학생들을 무차별하게 퇴학시킬 수 있었습니다. 대학생들을 퇴학시킬 수 있는 목록에 이러한 이유도 있었습니다.
서유럽식 몸에 꼭 끼는 트렌치코트, 즉 비옷을 입었을 경우 브라질 축구 국가 대표팀이 소련보다 낫다고 말했을 경우 여학생들이 무릎을 보이게 하는 짧은 치마를 입었을 경우 무도회에서 서유럽이나 미국 음악을 들으면서 춤을 췄을 경우 공산주의 이론과 성미가 맞지 않는 독일의 철학가 이마누엘 칸트의 책을 읽었을 경우 공산주의 체제를 비판한 친구들을 고발하지 않았을 경우 부모나 친척이 정치범으로 구속됐을 경우.
저의 어머니도 그 시대에 많은 고생을 하셨습니다. 외할아버지는 15년 동안 공군 장교 생활을 하셨는데, 루마니아가 공산주의 국가가 되고 나서 공산당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고, 소련의 스탈린과 공산주의를 숭배하지 않았고, 공산주의 정부를 반대하는 친구들을 고발하지 않았습니다. 외할아버지는 양치기 가정에서 태어나 자신의 노력으로 성공하여 평생 동안 공산주의 정부의 거짓말, 선전과 지도자 숭배를 받아 들이진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밀 경찰은 1940년대 후반과 1950대 초반에 외할아버지를 '민족의 원수'라고 체포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몇 년 동안 친구들의 지하실과 다락방에서 살았습니다. 다행이 그는 1950년대 중반에 경찰의 감시를 그만 받고 탄갱부로 인생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외할아버지가 '민족의 원수,' 즉 공산주의 독재를 반대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저의 어머니는 대학 입학을 할 순 없었습니다. 그래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같이 살면서도 서류상 이혼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의 어머니는 대학 입학을 했습니다. 물론 그러한 상황이 너무 힘들었지만, 저의 어머니는 루마니아가 아닌 인권 유린과 정치 탄압이 더욱 더 심한 곳에서 태어났으면 어머니뿐만 아니라, 외할아버지의 3세대, 즉 손자인 저까지 수용소에서 살게 됐을 것입니다.
지고촌인 세계화 시대, 2010년 9월에 루마니아 학생들은 민주주의 현대 국가안에서 개학을 맞이하게 됩니다. 물론 학교 시험은 여전히 어려운 도전이지만, 20년전 공산주의 독재 체제를 무너뜨린 동유럽 나라에서 어두운 공산주의 시대보다 열심히 노력하는 젊은이들에게 밝은 미래는 확실히 보이게 될것입니다.
0:00 / 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