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칼라튜] '발칸 도살자'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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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전인 2006년 3월 11일 당시 64세인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이 네덜란드 즉 화란의 헤이그에 있는 유고국제전범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Tribunal for the Former Yugoslavia, ICTY)의 감옥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습니다. '발칸의 도살자'로 불리던 전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이 1990년대 유고전쟁 때 보스니아와 흐르바쯔까 (크로아티아)에서 있었던 끔찍한 '인종청소,' 반인륜 범죄와 전범의 주요 책임자였습니다.

발칸 반도의 역사를 모르는 사람의 관점에서는 유고슬라비아의 구성과 와해, 1990년대 잔인한 전유고슬라비아 민족들끼리의 전쟁은 복잡하고 이해하기가 어려운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20세기 초, 특히 제1차 대전 직후 오스만 뛰르끼예 (터키)와 오스트리아—마쟈르 (헝가리) 제국들이 와해되면서 중유럽의 민족주의가 떠올랐습니다. 과거에 오스만 뛰르끼예 (터키)나 오스트리아—마쟈르 (헝가리)의 지배를 받던 쓰르비아 (세르비아), 쯔르나고라 (모느테네그로), 마께도니아 (마케도니아), 흐르바쯔까 (크로아티아), 보스니아와 슬로베니아 사람들은 발칸반도의 서쪽에 슬라브 민족들의 유고슬라비아라는 연방을 구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언어는 같은 슬라브 계통이지만 문화적, 특히 종교적 차이점이 많았습니다. 예를들면, 쓰르비아 (세르비아) 사람들은 동방 정교회이고, 흐르바쯔까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천주교, 보스니아 사람들은 이슬람교입니다. 뿐만아니라, 언어가 같은 슬라브 계통이 아닌 문화, 전통과 가치관이 완전히 다른 알바니아 소수민족도 꼬쏘보 (코소보)라는 지방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유고슬라비아는 제2차 대전 때 심한 위기에 빠져 버렸습니다. 파쑈 (나치) 독일의 침략을 당하면서 흐르바쯔까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파쑈 (나치)와 손을 잡아 유태인들, 쓰르비아 (세르비아) 사람들과 집시들을 수용소로 보내고 대학살 했습니다.

제2차대전직후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부활했습니다. 연방을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은 바로 1980년까지 유고슬라비아의 공산주의 독재자이던 요시프 브로즈 티토였습니다. 티토는 공산주의자였지만, 소련의 지배를 받아들이진 않았습니다. 그래서 티토는 미국이나 서유럽,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인기가 좋았습니다. 티토는 비동맹국가협력 운동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개발도상국의 대우도 많이 받았습니다.

티토 시대에 유고슬라비아는 소련의 지배력을 받은 다른 공산국가보다는 경제 상황이 훨씬 좋았습니다. 저도 어린 시절 공산주의 독재 국가이던 로므니아 (루마니아)에서 살며 겪었던 소비재 부족, 특히 식량 부족의 추억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그 당시 로므니아 (루마니아) 젊은이들이 듣던 록 음악 음반이나, 미국, 서유럽, 또는 일본, 대만, 홍콩이나 한국에서 만든 전자 제품, 옷과 신발들은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밀수입해 암시장에서 거래 되고 있었습니다.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공산주의 독재하에서 여권을 발급받는 것은 로므니아 (루마니아) 사람들에게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당국의 허락을 받고 가는 해외여행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지만, 공산주의 탄압과 인권 유린을 더 이상 참지 못한 사람들은 망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다뉴브강을 건너 유고슬라비아로 넘어가 자유세계로 망명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다 총에 맞아 죽은 사람들은 수 천명이었습니다.

공산주의 시대 유고슬라비아는 로므니아 (루마니아) 사람들에게 자유민주주의 세상을 살짝 훔쳐볼 수 있는 좁은 창문과도 같았습니다. 지난 20여년 동안 중국과 북한의 경우가 비슷하다고 볼수 있습니다. 중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는 아니지만, 경제개혁정책을 어느 정도 추진해 다른 공산주의 국가에 비해 비교적 경기가 좋고 더 개방적입니다.

북한 사람들도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휴대전화 같은 수입제를 암시장에서 구입할 수 있고, 1980년대말까지 로므니아 (루마니아) 사람들이 다뉴브강을 건너 망명했던 것처럼 북한을 떠나려면 두만강을 건너야합니다. 그래서 북한 사람들은 냉전시대에 로므니아 (루마니아)와 유고슬라비아의 사이를 누구보다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1989년말 공산주의 독재를 무너뜨린 로므니아 (루마니아)의 혁명이 유고슬라비아와의 국경과 가까운 티미쉬아라라는 도시에서 시작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 민족들끼리의 조화는 표면적인 것이었습니다. 티토도 유고슬라비아의 여러 민족들의 정체성과 민족주의를 탄압했을뿐, 유고슬라비아 민족들끼리의 성실한 화해를 찾으려 하진 않았습니다. 그래서 티토가 1980년 사망한 후 유고슬라비아는 이웃나라인 다른 공산국가보다 상황이 좀 더 나았어도 심한 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1980년대 말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이 되어 쓰르비아 (세르비아), 흐르바쯔까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슬로베니아 사람들의 화해와 상호 이해의 길을 찾으려 하지 않았고, 유고슬라비아의 정권을 확실하게 잡은 쓰르비아 (세르비아) 사람들의 민족주의를 자신의 임무로 정했습니다. 밀로셰비치가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쓰르비아 (세르비아) 민족주의, 또는 국수주의의 길을 택하면서 슬로베니아, 흐르바쯔까 (크로아티아), 보스니아와 마께도니아 (마케도니아)는 쓰르비아 (세르비아)의 국수주의와 탄압을 느꼈기 때문에, 결국 독립국가가 됐습니다. 밀로셰비치는 유고슬라비아의 민족들이 택한 유고슬라비아의 와해를 엄청난 군사력으로 막으려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민간인들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고통을 겪었고, 수십만명이 희생됐고, 수 백만 명이 '인종청소'를 당하면서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밀로셰비치의 독재와 국수주의는 엄청난 비극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쓰르비아 (세르비아) 사람들 중에는 밀로셰비치를 쓰르비아 (세르비아)의 영토를 지키려 하던 애국자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전범, 대학살, 반인륜 범죄를 일으킨 히틀러나 스탈린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을 죽게 하고, 경제와 미래를 파괴시키는 일을 일삼는다면 과연 영웅이라 할 수 있을까요.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에 의하면 김씨 일가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북한의 인권 유린도 반인륜 비인간적 범죄에 해당됩니다. 북한의 열악한 인권 상황을 개선하는 것이 뭣보다도 시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