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칼라튜] 코마네치와 북한 올림픽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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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8월 5일부터 21일까지 브라질 도시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제31회 하계 올림픽이 열립니다. 북한 선수 35명이 이번 하계 올림픽에 진출했습니다. 한국 선수들은 북한보다 약 여섯 배나 되는205여명의 하계 올림픽 국가 대표 선수단이 출전합니다. 냉전 시대에 북한과 상황이 많이 비슷했으나,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길을 되찾은 저의 조국인 북한에서 '로므니아'라 불리는 루마니아는 104명의 선수단을 보낼 예정입니다.

지난 7월 18일은 루마니아 사람들에게 의미가 깊은 기념일이었습니다. 40년 전 1976년 7월 18일 14살이던 나디아 코마네치라는 루마니아 체조 선수는 캐나다 몬트리올 하계 올림픽에 출전해 사상 최초로 10점 만점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평균대, 개인 종합, 이단 평행봉 금메달 셋, 단체 종합 은메달 하나, 마루운동 동메달 하나를 땄습니다. 코마네치는 1980년 모스크바 하계 올림픽에서도 금메달 두 개와 은메달 두 개를 땄습니다. 지난 40년 동안 '체조 여왕'이라 불린 나디아 코마네치덕분에 여자 체조는 전 세계에서 많은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그녀는 20세기 최고의 운동 선수 중 하나로 여겨집니다. 저는 그때 6살밖에 안됐었지만, 지금도 그날의 추억이 생생합니다. 당시 루마니아 사람들은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라는 독재자의 정권하에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정치 탄압, 경제 위기와 독재자 개인 숭배가 가장 심하던 1980년대보다 상황이 좀 덜 심했습니다.

독재자는 자신의 개인숭배를 위해 돈을 많이 낭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올림픽이나 축구 월드컵 중계권료를 내기 아까워했기 때문에 루마니아 사람들은 1976년 올림픽을 시청할 수 있을 것이라고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유독 그때는 루마니아 중앙TV방송에서 새벽부터 몬트리올 하계 올림픽을 계속 중계했습니다. 올림픽 체조 경기를 지켜보고 있던 루마니아 시청자들 중에서 14살밖에 안된 코마네치가 체조의 역사를 바꿔놓을 것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이 그리 많진 않았습니다. 코마네치는 1975년 유럽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었지만, 특히 구 소련의 유명한 체조 선수들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전 체조 경기에서 만점이라는 점수가 나온 적이 없었기 때문에, 올림픽 체육관 액정표시기에 처음에는 10점이 아니라, 1점이라고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날 코마네치는 체조의 역사를 바꿔놓으며 세계 스포츠 역사에 기록을 남겼습니다.

저는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유럽, 미국과 캐나다를 다녀봤지만, 루마니아 사람이라고 하면 유명한 루마니아 조각가, 예술가, 철학가나 학자들이 그렇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외국인들은 주로 세 인물만 연상합니다. 즉 나디아 코마네치, 악명 높은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와 소설과 영화에 등장하는 루마니아 출신 흡혈기 드라큘라입니다.

코마네치는 루마니아의 가장 강력한 상징이라 볼 수 있습니다. 나디아 코마네치의 인생도 루마니아의 현대 역사의 운명과 결합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1976년 올림픽에서 자신의 재능과 노력에 의해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그녀는 루마니아 독재자와 그의 아내의 명령으로 '사회주의노동 영웅'으로 추대됐습니다. 공산주의 언론은 코마네치의 이미지를 이용해 차우체스쿠 정권을 외국에서 선전하려고 했습니다.

국내에서 공산당 행사를 할 때마다 코마네치는 공산당 간부들 앞에서 독재자와 그의 아내에게 감사의 발표를 해야 했습니다. 또한 나중에는 독재자의 막내아들 니쿠가 코마네치에게 연인으로 다가가려고 했기 때문에 힘들었고 코마네치의 감독이던 벨라 카롤리와 그의 아내인 마르타가1981년 미국으로 망명해 미국 국가대표팀감독이 된 후 코마네치도 망명할까 봐 비밀경찰의 심한 감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반공산주의 혁명 2주전인 1989년 11월 마쟈르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를 걸쳐 미국으로 망명했습니다. 그래서 아직까지 많은 루마니아 사람들은 나라의 상징이던 코마네치의 망명이 독재자 차우셰스쿠의 정권 붕괴를 예측했다고 믿습니다. 그녀는 미국으로 와서 루마니아 공산주의 독재 탄압에 의한 자신의 인생의 위기를 극복하며1976년 올림픽 남자 체조 금메달을 딴 미국 선수 바르트 코너랑 1996년 결혼했습니다. 남편과 함께 체조 학교를 운영하고 책을 쓰기도 하고 '세계 체조 선수'라는 잡지를 출판했습니다. 저도 몇 년 전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에서 코마네치와 남편 바르트 코너를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같이 맥주를 마시던 바르트 코너가 이러한 농담을 했습니다: '아니, 나도 198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하계 올림픽에서 평행봉 금메달 하나를 땄는데, 나를 알아 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고, 모두 다 아내만 알아 주니 기분이 상하네요." 코마네치는 이젠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루마니아에도 자유로이 다녀오면서 루마니아 고아들과 루마니아 체조 발전을 위한 봉사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미국 고위 인사들이 루마니아를 방문할 때 코마네치는 루마니아 대통령과 함께 그들을 환영하는 모습이 세계 뉴스에서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젠 55세인 코마네치는 10년 전 아들을 낳으며 자신과 남편의 오래 전부터의 꿈이 이뤄졌다고 했습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떠오른 완벽의 여왕이 가족을 위해, 세계 체조를 위해, 또 루마니아 어린이를 위해 앞으로도 계속 많은 일을 할 것입니다.

이번 북한 선수 국가 대표단이 숫자적으로 한국보다 훨씬 적습니다. 그러나 40년 전 루마니아 코마네치처럼 정치 탄압과 인권유린에 의해 나라의 상황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번 브라질 리우 하계 올림픽에서 역사를 바꿔 놓을 북한 선수가 탄생하길 기원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