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칼라튜 칼럼]반항하던 독재자의 딸

0:00 / 0:00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체스쿠와 아내 엘레나는 생전에 2남1녀를 두었습니다. 이들 중 둘째 아들과 딸은 정치와 거리를 두었지만 큰 아들은 달랐습니다. 큰 아들 '니쿠'는 공산당 청소년회장으로 활동을 하여 그가 차우체스쿠의 뒤를 이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니쿠에게는 술고래인데다 특히 도박과 성폭행을 일삼는다는 소문이 항상 따라 다녔습니다.

1989년말 루마니아에 반공산주의 유혈 혁명이 일어나자 차우체스쿠와 그의 아내 엘레나는 성탄절인 1989년 12월 25일 군사재판에 의해 사형을 당했습니다.

차우체스쿠 부부의 큰아들인 '니쿠'는 1996년 9월 26일 45살때 간암으로 사망했습니다. 2006년11월 21일 차우체스쿠의 딸 '조야 차우체스쿠'도 큰오빠인 '니쿠'가 사망한지 10년이 지난 2006년 11월 21에 사망했습니다. 사망할 당시 쉰 일곱 살이었으며 줄담배를 즐기던 그녀의 사망원인은 폐암이었습니다.

아버지의 후계자로 국내외에 널리 알려졌던 큰 아들 '니쿠'는 80년대 후반 반공산주의 혁명이 루마니아에 일어나자 혁명에 가담한 민간인들을 총으로 쏘라는 명령을 내렸고 후에 재판에서 몇년의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감옥에 가진 않았습니다. 그러다 그는 1996년 9월 간암으로 사망했습니다. 루마니아 독재자의 딸이던 '조야'는 큰오빠인 '니쿠'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조야'의 부모는 그녀가 외무부에 들어가 대사가 되길 바랐지만, '조야'는 대학을 다니면서 수학을 전공했습니다. '조야'의 대학 친구들에 의하면 조야는 능력 있는 수학자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조야'의 부모는 그녀가 수학자가 된 것이 못마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위해서 '루마니아 수학 연구소'를 설립했습니다. '조야'는 어느 정도 반항심을 가졌지만, 반정부 인사가 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독재자의 딸로 식량 부족과 인권 유린이 심하던 루마니아에서 화려하고 풍요로운 생활을 즐겼습니다. 그녀가 독일제 자동차 '메르세데스 벤츠'를 루마니아의 수도인 부쿠레슈티 거리에서 몰고 다니는 모습이 시민들의 눈에 가끔 띄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같은 수학연구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를테면, 한 동기의 어머니가 정치적인 이유로 구속됐지만, '조야'는 아버지에게 부탁을 하여 친구의 어머니를 풀어주도록 했습니다. 큰 오빠 '니쿠'는 술, 도박과 성폭행 때문에 문제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그러한 문제를 봐주는 경우가 많았으나 독재자의 아내인 엘레나는 유난히도 딸인 조야를 엄격하게 키우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부모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친구가 생길 때마다 항상 반대했고 '조야'는 따라다니던 비밀경찰 요원들에게 방해를 받았습니다. 결국 차우체스쿠 부부는 '조야'가 그들의 편에 설만한 배경이 완벽한 사람과 연애하도록 하여 결혼을 허락했습니다.

공산주의 독재자의 딸이 부모에게 정치적으로 반항하는 경우는 차우체스쿠의 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옛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의 딸인 '스베틀라나'는 아버지가 사망한 지 14년이 지난 1967년에 미국으로 망명했습니다. 쿠바 공산주의 독재자인 카스트로의 딸인 '알리나'는 스탈린의 딸처럼 외국으로 망명한 다음 세상을 돌아다니며 토론회나 연설을 통해 아버지의 잔인한 독재 체제와 쿠바의 인권 유린을 비판하였습니다.

독재자의 자녀들에게 여러가지 다양한 삶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보다 더 권력을 남용한 사람도 있었고, 국외로 망명하여 독재체제를 비판한 사람도 있었고 아버지의 야망 때문에 희생당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한 독재자의 자녀가 훗날 지도자로 나서 인권 유린을 없애고, 국가적 개혁을 통해 국민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역사를 교훈삼아 좀 더 이상적인 경우를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날 독재자의 말로를 되돌아보면 독재자의 자녀들은 대개가 비참했던 아버지의 길을 따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차우체스쿠의 딸 '조야'도 생애를 비극적으로 마침으로써 사람들 마음에서 서서히 잊혀져 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