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대 칼럼] 베를린 장벽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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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은 동·서독을 갈라놓았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20년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우리와 같은 분단국이었던 독일 통일은 20세기말 인류역사에 남을 거대한 사건으로써 남북한에도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989년 11월 9일, 동서 냉전의 상징물이었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1년도 되지 않은 1990년 10월 3일, 동독과 서독은 마침내 통일을 이루어냈는데 그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복합적 요인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서독정부는 아데나워 초대 총리 이후 「힘의 우위에 의한 통일」정책에 입각하여 서독의 국력 증강과 국제적 위상 강화에 주력했습니다. 이처럼 서독의 민주주의에 대한 자신감과 막강한 경제력에 토대를 둔 대 동독 지원이 독일통일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1969년 집권한 빌리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 이후 서독정부가 「접촉을 통한 변화」전략에 따라 동서독 교류의 범위를 넓히고 화해협력을 추진했던 것이 독일 통일의 원동력 역할을 했습니다. 교류 협력의 실태를 보면 양 독일 간 교역은 민족 내부 거래로 간주하여 무관세 등의 특혜를 부여받았고 매년 8백만~9백만 명에 달하는 인적왕래가 있었으며 언론, 문화, 체육인의 교류도 활발했습니다.

셋째,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1985년에 시행한 개방과 개혁 정책의 결과, 동유럽 국가들이 그 영향을 받아 독자적인 노선을 걷기 시작한 것도 독일 통일의 원인으로 작용했습니다. 특히 1989년 헝가리가 서방국가인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을 열자 동독인들은 이 통로를 통해 서독으로 가려고 몰려들었습니다. 여기에 밀려 18년간 집권했던 동독의 독재자 호네커 서기장이 그해 10월 실각하면서 베를린 장벽이 군중의 손에 의해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넷째, 독일 통일은 동독주민들의 강력한 개혁요구가 작용한 결과였습니다. 당시 동독 지도자들은 소련의 개혁, 개방 정책을 반대했으나 주민들은 계속 개혁을 요구한 가운데 촛불 시위가 시작되었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자 서독과 통일 조약을 체결하게된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통일을 이룩한 독일은 그 후 적지 않은 통일 후유증을 겪기도 했습니다. 동서독 주민간의 소득 격차와 사회적 반목 현상이 아직도 남아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많이 치유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인류 문명사를 보면 항상 열위에 있는 문화는 우위에 있는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고 또 국력이 약한 국가는 국력이 강한 국가에 흡수되는 사례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독일의 경우도 자유와 행복이 없는 동독이라는 쇠붙이가 자유와 복지를 풍요하게 누리는 서독이라는 자석에 끌려 하나가 되는 결과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북한 당국이 독일 통일에 대해 흡수 통일이라고 매도함으로써 그 의미를 비하하고 있지만 국제사회는 독일 통일을 유럽 통합의 초석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북한이 제2의 동독 운명을 피하려면 개방·개혁을 통한 민주화의 길로 나가야할 것입니다. 또한 통일은 예기치 않은 시기에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우리 앞에 다가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독일 통일은 시사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