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험난한 탈북 과정을 그림으로 표현한 화가가 있습니다. 탈북화가 강진명 씨. 간암 진단을 받고 투병생활을 하고 있지만, 강 씨가 병마와 싸우는 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북에 두고 온 딸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입니다.
서울에서 정태은 기자가 보도합니다.
깊은 산 속, 부리부리한 눈의 호랑이가 엎드려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무섭게 느껴지기 보다는 엄숙함이 서려 있습니다. 이 그림의 제목은 ‘산신령’, 탈북화가 강진명 씨가 탈북 후 산 속에서 숨어 지내다가 만난 호랑이를 그린 작품입니다.
강진명: 제가 탈북해서 깊은 산 속에 있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진짜 범을 본거예요. 산 중에서 그것도. 턱 옆으로 퍼런 불이 두 개 있는 거예요. 갑자기 머리가 오싹하고 막 떨리는 거예요. 움직이지 못하겠는 거예요. 근데 참 흥미 있는 게 범이 그렇게 점잖더라고요.
평양에서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인민무력부에서 창작활동을 했던 탈북화가 강진명 씨가 이달 1일부터 11일까지 서울 인사동에 위치한 서울미술관에서 생애 첫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전시된 작품은 70여점, 강 씨가 암투병을 하며 1년여 간 그린 작품들입니다. 전시된 작품 중에는 북한의 금강산과 남한의 설악산을 그린 그림이 마주하고 있습니다.
강진명: 북한의 금강산, 묘향산, 칠보산 가보지 못했죠? 참 아름다워요. 북한의 금강산도 아름답지만 설악산도 참 아름답구나. 내 나라는 어디가나 다 수려한 녹수로 인해서 정말 금수를 이루고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들어요.
함경북도 무산 출신의 강 씨는 북한의 식량사정이 나빴던 99년 북한을 나와 10년 넘게 중국을 떠돌다 지난 2008년에야 한국에 올 수 있었습니다. 험난한 탈북의 여정을 강 씨는 휘몰아치는 파도로 표현했습니다.
강진명: 저기 저 자유의 파도 같은 경우에는 사람이 자유를 찾아온다는 게 쉽지는 않아요.파도라는 게 사람들한테 광활한 미래와 강인한 의지. 자유로운 움직임. 그리고 꼭 무엇인가 성공할 수 있는 기를 심어줄 수 있는 풍경들이예요. 그래서 제 그림에는 파도가 많아요. 특히 파도치는 모습이 많아요.
간암을 앓고 있는 강진명 씨가 병마와 싸우는 것보다 더 괴로운 것은 10년 전 헤어진 딸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강 씨가 북한을 떠나고 3년 뒤 북한에 있던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은 접했지만, 딸과 아들의 생사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강 씨는 사무치게 그리운 딸을 아름다운 선녀의 모습으로 표현했습니다. 혹여나 딸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강 씨는 이름이나 얼굴이 알려지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작품 활동이 알려지면 아이들이 자기를 찾아올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강진명: 제가 아이한테 말했어요. 너네는 죽어도 집에 가서 기다려라. 근데 사실 제가 그때 3개월 먹고 살 금액밖에 못 줬어요. 그거 줘서 보냈는데 그거 가지고 며칠이나 살았겠어요. 얼마나 무정부적인 사회예요. 저는 자꾸 의구심이 드는 게 죽지 않았냐. 이 생각이 자꾸 들지. 지금 생각하면 가슴 아파 죽겠어요.
강 씨는 앞으로 탈북하는 과정에서 경험한 것들을 화폭에 담아낼 생각입니다. 조국에서는 배신자로 낙인찍히고, 제 3국에서는 국적을 숨기고 불안하게 살아가야 하는 탈북자들의 사연을 세상에 알리는 일이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강진명: 저는 죽지 않아요. 암진단 받았지만, 죽지 않아요. 해야 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이제부터 우리가 걸어온 그런 장면을 작품으로 많이 남길 거예요. 이 땅에 와서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저밖에 없어요.
탈북화가 강진명 씨는 고통스런 탈북과정에서 얻은 병마와 싸우면서도 예술에 대한 강한 열정을 내보였습니다. 강씨의 이같은 불굴의 의지에 감동한 많은 사람들이 생애 첫 개인전 현장을 찾아 축하해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