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가정을 꾸린 탈북 가정들을 만나보고 있습니다. 이번에 만나 볼 탈북자는 탈북 후 미국에서 미주 한인을 만나 가정을 꾸린 이정애씨를 유지승 기자가 만나봤습니다.
2000년 중국으로 탈북에 성공한 이정애씨는 중국과 한국에서 생활한 후 지난 2010년 미국에 왔습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해 많은 미주한인들의 도움을 받았고, 스스로도 자유세계 정착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자유세계. 무엇을 해야 할 지, 앞으로 뭘 하고 살아야 하는지 이정애씨는 막막했습니다.
이 때 이정애씨 옆에서 도움을 주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을 물심양면으로 자세히 알려준 미주한인 조나단 최 씨가 있었습니다. 덕분에 이정애 씨는 일찍 미국 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애정이 싹터 이정애씨는 조나단 씨와 결혼해 5살 된 아이를 둔 한 가정의 어머니가 됐습니다.
결혼 생활은 사실 순탄치 않았습니다. 억압된 북한 사회에서 살던 이정애씨와 자유 속에 살던 남편 조나단 씨는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를 모두 극복하고 이해해 준 남편 조나단 씨 덕분에 안정적인 삶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탈북한 지 15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북한 사투리는 남아 있습니다. 의식적으로 북한 억양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몸에 밴 습관이 좀처럼 고쳐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들 동훈이는 사투리는 배우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지금은 유치원에 다니지만 곧 학교에 진학해 혹시나 학교에서 엄마가 북한에서 왔다고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입니다.
이정애 탈북자: 지금 킨더(유치원)를 다니고 있습니다. 제가 북한에서 왔으니까 사투리 하면 동훈이도 가끔 사투리를 하더라고요. 아 싫은데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해요. 아이는 사투리 쓰는 게 싫습니다.
이 모든 것을 극복하며 살다 보니 어느덧 미국에 정착한 지 6년째가 됐습니다. 그리고 적응도 됐습니다. 이제는 세상을 향해 한 발자국 더 내 디딜 수 있게 됐습니다.
이정애 씨는 아침에 아이를 학교에 보내면서 자신도 학교로 갑니다. 하고 싶은 일이 생겼고, 또 가정에 경제적으로 힘도 보탤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의류 디자인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이정애: 지금 패턴 학원을 다니고 있어요. 1년 배우고 그 다음에는 취직을 해서 어떻게든 취직을 해야 되겠다(생각하고) 지금 열심히 다니고 있습니다. 지금은 신랑 믿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2015년 새해를 맞이해 올해는 꼭 취직하겠다고 다짐을 밝힌 이정애씨는 종종 부모생각에 눈시울을 적신다고 합니다. 열심히 살면서 보답하겠다고,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명절이나 부모님 생신 때가 되면 잊혀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정애: 북한에 계시는 부모님 제일 생각이 납니다. 동생도 있고, 명절이나 연말 새해 그때 제일 생각이 많이 납니다. 예전에는 엄마 아빠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많이 났었습니다. 이제는 시간이 너무 지나다 보니까 솔직히 눈물도 이제는 안 납니다. 하지만 엄마 생일이다, 아빠 생일이다 이럴 때는 꼭 생각이 나더라고요.
탈북 후 미국에서 경제적으로도 안정이 됐고, 가정을 꾸린 것을 부모님에게 보여드리고 싶다며 눈물짓는 이정애씨. 가능하다면 북한의 부모님이 잘 살고 있는지 확인이라도 해보고 싶다고 말합니다. 북에서 잘 산다는 것. 그냥 따뜻한 밥이라도 잘 드시고 계시는지 궁금하다고 합니다. 또 가능하다면 돈이라도 보내고 싶다며 빨리 경제적으로라도 북한이 개방이 됐으면 좋겠다고 소망을 말합니다.
이정애: 소망이 있다면 (북한에 있는 부모와) 어떻게 연락이 돼서 부모가 잘산다는 것이 물건이나 이런 것을 갖춰 놓고 사는 것이 아니라, 먹고 사는 것, 밥이라도 배부르게 먹었으면 하는 그런 생각이 많이 듭니다. 돈 벌어서 보내고 싶어요. 그게 소망입니다.
이정애씨는 올해 나이 36세 양띠입니다. 이정애씨는 올해 양띠 해를 맞아 좋은 일들이 많이 다가올 것으로 기대한다며 환히 웃으며 인터뷰를 마치고 아들 동훈이의 손을 꼭 붙잡고 돌아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