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재완 기자가 보도합니다.
북한은 최근 발행한 <천리마> 10월호에서 정권수립 60주년을 기념해 '200일 전투'를 크게 소개했습니다.
200일 전투는 지난 1988년 정권수립 40주년을 맞아 사회주의 경제건설에 속도를 내기 위해 실시된 것입니다.
<천리마> 잡지는 "우리식 사회주의의 우월성과 불패의 생활력을 온 세상에 과시한 력사적 사변이었다"고 선전하면서 성공적인 경제 노력운동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의 주장과는 달리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으로 북한 전문가들은 평가하고 있습니다.
북한전략센터 김광인 소장입니다.
김광인: 건설 자체에는 약간의 성과는 있었지만, 그것이 다음에 또 다른 200일 전투, 150일 전투 이런 식으로 되풀이 되다보니까 경제 균형발전에 문제가 생기고, 또 전투에 참여한 주민들도 피로 현상이 나타나서 총론적으로 보면 그것이 성과를 냈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200일 전투'를 경험한 탈북자들은 북한이 단기적 성과를 거두기 위해 이를 무리하게 추진했기 때문에 실제 '200일 전투'가 끝난 뒤 자원이 고갈돼 경제파탄으로 이어졌다고 평가합니다.
전 조선•체코 신발기술합작회사 사장 김태산 씹니다.
김태산: 200일 전투가 끝난 다음에는 당에서도 손 놓고, 경제 일꾼들은 다음 경제생산을 밀고 나가려고 하니까.. 현재 가지고 있던 예비물자들 다 써먹었지.. 그러니까 그 다음부터는 완전히 경제부문에서 생산기획 숫자를 발표도 못했을 정도로 혹심한 피해를 가져왔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200일 전투'는 1988년 2월20일 당중앙위 정치국 회의에서 제시됐으며 그해 9월9일 정권창립 40주년까지를 시한부 대중 노력 경쟁 운동이었습니다.
앞서 70,80년대 3차례에 걸쳐 시행된 '100일 전투'처럼 공업생산과 경제건설에서 단기적으로 성과를 내기 위해 도입한 속도전의 일환인 것입니다.
그러나 '200일 전투'는 1988년 9월2일에서 4일까지 열린 전국영웅대회에서 2차'200일 전투'로 이어집니다.
새로운 '200일 전투'가 제기된 것은 1차 '200일 전투'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세계청년학생축전에 필요한 시설을 비롯한 각종 공사가 부진했던 탓입니다.
200일 전투는 이전의 노력 투쟁과 마찬가지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의해 발의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