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막 경제 출발점 된 ‘70일 전투’ 35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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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속도전 노력운동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70일 전투’가 시작된 지 정확히 35년이 되는 날입니다.

‘70일 전투’는 단기적으로 성과를 거두긴 했지만, 실상은 오히려 북한경제를 악화시킨 결과를 초래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노재완 기자가 보도합니다.

“생산도 학습도 생활도 항일유격대 식으로!”

“사상도 기술도 문화도 주체의 요구대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후계자가 된 뒤 경제부문에 대한 지도력을 강화하기 위해 추진했던 ‘70일 전투’의 구호들입니다.

김일성 주석은 1974년 2월 당 중앙위원회 제5기8차 전원회의에서 ‘사회주의경제건설의 10대 전망목표’라는 것을 제시하고, 당 창건 30주년이 되는 75년 10월까지 무조건 달성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6개년계획의 4년 차에 해당하는 1974년 하반기에 들어서도 경제가 부진을 면치 못하자 김 주석은 10월 초 당 중앙위 정치위원회를 소집하고 대책을 내놓으라며 간부들을 독촉합니다.

이 때 김 위원장이 당 중앙위 정치위원회 위임을 받고 내놓은 처방전이 바로 ‘70일 전투’입니다.

‘70일 전투’는 74년 10월 21일부터 연말까지 70일간 한시적으로 전개한 증산투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70일 전투’가 시작되자 전국의 모든 도시와 마을에서는 ‘충성의 돌격대’가 조직됐고, 김 위원장 자신도 집무실을 ‘70일 전투 총사령부’로 삼고 매일 진척상황을 점검했습니다.

평양 인민경제대학 출신으로 조선-체코 신발기술합영회사 사장을 지낸 탈북자 김태산 씨입니다.

김태산: 집에서 부모들은 밥을 날라다 줬고, 노동자들은 70일 전투가 끝날 때까지 기계 옆에서 자면서 24시간 일했습니다.

북한 당국은 당시 ‘70일 전투’를 통해 6개년계획을 1년 6개월이나 앞당겼다고 발표했습니다.

공업생산은 전투 이전에 비해 평균 1.7배로 높아졌고, 1974년 11월과 12월에는 공업 총생산액이 각각 전년도 같은 달에 비해 148%와 152%로 늘어났다고 밝혔습니다.

아울러 농업부문에서도 6개년계획의 7백만 톤의 알곡고지를 2년이나 앞당겨 점령했다고 선전했습니다.

북한의 주장대로 ‘70일 전투’는 단기적으로 성과를 거두긴 했지만, 실상은 오히려 북한경제를 악화시킨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북한전략센터 김광인 소장입니다.

김광인: 북한은 6개년계획에 이어 2차7개년계획을 78년부터 시작하는데, 그 사이 2년간을 완충의 해로 설정합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70일 전투를 통한 6개년계획이 차질이 생겼기 때문인데요. 78년부터 시작된 제2차7개년계획도 초기에 공업 생산성이 급격히 떨어지는 등 경제가 장기적인 침체국면으로 빠져듭니다. 이런 점에서 70일 전투는 결과적으로 이후 북한 경제의 큰 주름살을 주는 후유증을 남기게 됩니다.

당시 김 위원장이 70일 전투를 벌이면서 적용한 경제난국 해결방식은 인민들의 혁명적 열의를 최대한 발동시키는 ‘사상전’과 경제건설에서 속도를 중시하는 ‘속도전’이었습니다.

‘사상전’과 ‘속도전’은 가용한 자원과 투자 여력이 고갈된 상태에서 주민들의 사상의식에 의존해 최단 시일 안에 생산성 증대를 이룩하는 것입니다.

이미 중국의 모택동이 1960년대 문화혁명을 통해 그 오류와 한계가 드러났음에도 북한에서 또 다시 강조되면서 이후 북한 사회주의 경제건설의 방식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