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재완 기자가 보도합니다.
60년대 중거리 세계육상 최강자로 알려진 북한의 신금단 선수가 최근 발행된 북한 화보 <조선> 11월호에 소개돼 눈길을 끌었습니다.
화보는 신금단 씨가 집에서 건강한 몸으로 70회째 생일을 맞이했다고 소개하면서 체육인으로서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북한의 첫 인민체육인으로 알려져 있는 신 씨는 70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압록강체육단'에서 선수들을 직접 지도하는 모습이 화보에 실렸습니다.
한국에서 신금단 씨는 이산의 아픔을 상징하는 인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지난 1964년 도쿄올림픽이 개막되기 하루전인 10월 9일. 북한 육상 대표선수로 출전한 신금단 씨가 14년 전에 헤어진 아버지 신문준 씨를 도쿄에서 만나는 극적인 장면은 전 세계로 타전돼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습니다.
이들의 만남은 고작 7분이었지만, 당시 한국을 '눈물 바다'로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 때 상봉하고 난 뒤 다시 헤어지는 장면에서, 신 씨가 "아바이~"라고 울부짖어 그 말이 유행하면서 한국에서는 그해 신금단 부녀의 상봉을 주제로 한 노래 <눈물의 신금단>까지 나오게 됐습니다. 분단의 아픔을 상징하는 노래였던 것입니다.
평북 출신의 실향민 강승희 씨의 말입니다.
강승희: 안타깝죠.. 신금단이도 아버지를 만나는데 표현을 못하고 그랬습니다.. 그게 상당히 순수한 이산의 아픔을 정말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인데, 다만 이런 안타까움을 이북은 인정을 안하고..
결국 아버지 신 씨는 두고 온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안은 채, 1983년 67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963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신생국경기대회'에서 400m와 800m에서 두 개의 세계신기록을 수립했던 신 씨는 이듬해인 64년 도쿄 올림픽에서 강력한 금메달 후보였습니다.
그러나 국제올림픽위원회가 '신생국경기대회'를 올림픽 유사대회로 규정하고 이 대회에 참가했던 선수들의 올림픽 출전 자격을 박탈한다고 결정하면서 이에 반발한 북한 선수단은 결국 철수하고 신 선수는 끝내 올림픽 메달의 꿈을 이루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