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급 탈북 늘어나지만 관심은 더 적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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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지난 22일은 이수근 북한 조선중앙통신사 부사장이 판문점을 통해 남한으로 귀순한 지 50년 되는 날이었습니다. 이수근 부사장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고위급 탈북자였기 한국은 물론 해외에서도 큰 주목을 받았는데요. 당시 판문점 출입기자였던 신경식 헌정회장은 "그때 상황은 굉장히 긴박했다"고 기억했습니다.

서울에서 목용재 기자가 신 회장을 직접 만나 당시 사건을 재조명했습니다.

1967년 3월 22일 저녁. 북한 조선중앙통신사의 부사장이 판문점을 통해 남한으로 귀순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탈북자가 많지 않았던 시기 북한 고위급 인사의 귀순은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당시 판문점 출입기자였던 신경식 헌정회장은 “그날 낮에 판문점에서 나와 농담을 주고 받던 사람이 남한으로 넘어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회고했습니다.

신경식 헌정회장(전 판문점 출입기자): 미 8군 비행장에 착륙한 헬리콥터에서 미군 장교가 내린 후 이수근 부사장이 내렸습니다. 얼굴을 보니까 낮에 나와 팔각정에서 얘기했던 이수근인 겁니다. 내가 뛰어가서 이수근의 얼굴을 보며 꽉 붙잡으니 이수근도 나를 보고 반가워했습니다. 북한사람이 낯선 미군 기지에서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신 회장에 따르면 당시 이수근은 1967년 3월 22일 열린 제242차 정전위원회 본회의 취재차 판문점에 와 있었습니다. 당시 이수근은 비밀리에 “남한으로 가고 싶다”는 의사를 유엔 측에 알렸고 유엔은 이수근의 귀순 의사를 수용했습니다.

신 회장은 “당시 이수근이 유엔 측에서 마련한 차량을 타기까지의 상황은 매우 긴박했기 때문에 북한 인민군들이 총까지 사용했다”고 말했습니다.

신경식 헌정회장: 회의가 끝날 무렵 판문점 회의장 앞에 유엔 측 차량을 세워놨습니다. 당시 사진기자들이 사진을 찍는다고 왔다갔다 하는 상황에서 이수근이 바로 차량에 올라탔습니다. 그러자 유엔사 간부 한명이 바로 올라탔고 그 간부의 지시로 차량은 남쪽을 향해 달렸습니다.

이후 북한은 “납치된 이수근을 송환하라”고 요구했고 남한을 비롯한 유엔 측은 “자유의사로 귀순한 것”이라며 북한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이수근 귀순 사건을 취재했던 신경식 헌정회장은 최근 이어지고 있는 고위인사의 탈북을 보며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탈북자를 대하는 한국 정부와 국민의 관심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신경식 헌정회장: 1960년대에는 탈북자가 오면 시청 앞에서 환영대회도 했습니다. 정부에서는 탈북자에게 집도 주고 생활 정착금도 줬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탈북자들이 왔는지 안왔는지 관심이 없습니다. 목숨 걸고 온 사람들에 대한 대우가 소홀합니다.

신 회장은 이어 “탈북자들을 잘 대해주는 것 만큼 좋은 대북정책이 없을 것”이라면서 “적절한 탈북자 정책을 세워 시행하면 이와 관련한 소식이 북한으로 전해져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한편 이수근 전 조선중앙통신사 부사장은 1969년 7월 남한의 국가보안법 위반해 사형을 당했습니다. 당시 구체적인 죄목은 ‘위장간첩’이었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지난 2008년 이수근에 대해 “위장간첩으로 인정할 증거가 없다”는 재심판결을 내린 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