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urprise!! 생일축하합니다! Happy birthday to you!
이런 Surprise Party처음이에요? 아, 처음이죠, 이게. 생일파티는 해 봤잖아요? 이렇게 축하받고 하는 건 못해봤어요.
2013년 11월 17일 미국 수도 워싱턴 근처 어느 한국음식점에서 열린 탈북자 신동혁 씨의 ‘깜짝생일파티’입니다. 그는 이날 자신이 주문한 생선매운탕이 나오자 맛있게 먹다가 옆자리의 인권운동가 헨리 송 씨에게 듬뿍 덜어줍니다.
Effect) Make wishes!! Clapping
생일케잌 위의 촛불을 ‘훅’ 불어 끄며 소원도 빌어보고, 함박 웃으며 예쁘게 포장된 선물도 하나 하나 풀어봅니다. 따뜻한 겨울 스웨터, 멋진 넥타이, 셔츠단추를 장식할 보석단추 등…
신동혁: 북한에서는 이건 상상도 할 수 없는데, 한편으로는 너무 기쁘지만 한편으로는 가슴아프기도 한 게 내 동료들, 내 아버지나 친척들은 아직도 수용소에서 이런 것을 꿈에도 생각 못하니까 좀 마음이 복잡해요.
<< 신동혁, 1982년 11월 19일 북한 평안남도 개천 완전통제구역 ‘14호 수용소’ 출생. 아버지 신경섭: 한국전쟁 시 형제가 남한에 갔다는 이유로 수감, 어머니 장혜경: 수감이유 불명>>
신동혁 증언: 저는 태어날 때부터 죄수였고, 늙어죽을 때까지 죄수라는 신분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죄수는 수용소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시키는 일만 해야 됐었고, 주는 음식만 먹어야 됐고, 우리가 갈 수 있는 곳도 없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때리면 매맞고, 또 밥을 안 주면 굶고 이런 것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습니다.
<<2013년 8월 서울. 유엔 북한인권 조사위원회 공개청문회 첫 증인 신동혁. >>
간수와 죄수 밖에 없던 수용소. 죄수는 하루종일 3~4 숟가락의 옥수수죽, 소금에 절인 배추가 전부였고, 강제노역과 고문,공개처형에 시달리곤 했습니다. 늘 배를 주렸지만 간수의 승인없인 쥐도 마음대로 잡아먹을 수 없었던 곳.
신동혁 증언 : 수용소에 쥐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쥐를 먹는지 보기 위해서 간수가 쥐를 잡은사람한테 살아있는 쥐를 먹어보라고 하자 그 친구는 아무 거리낌없이 살아있는 쥐를 털까지 다 먹었습니다.
<<5살때 처음 공개처형을 목격. 7살땐 길에서 주운 옥수수알 5개를 주머니에 숨겨둔 것이 발각된 같은 반 여자아이가 나무방망이로 머리를 맞고 숨졌다. 14살때 어머니와 형의 수용소 탈출계획을 엿듣고 간수에게 신고했지만 그 간수는 자신의 공적으로 돌렸다. >>
탈출하는자는 총살한다, 탈출을 신고하지 않으면 총살당한다는 수용소 10개 규칙 제1조 1항과 2항. 가까운 사람을 고발하면 오히려 충성심이 높다는 것을 증명해 음식을 더 많이 얻을 수 있다는 생각 뿐이던 소년. 그러나 그는 수용소 지하 감옥으로 끌려가 족쇄에 묶여 거꾸로 매달린 채 등에 불고문을 당하며, 탈출을 기도해 자신에게 이런 가혹한 고통을 가져온 어머니와 형을 증오했습니다. 6개월 후, 감옥에서 풀려난 그는 어머니와 형의 공개처형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지켜봤습니다.
2012년 3월 발간돼 세상을 놀라게 한 신동혁의 이야기 ‘Escape from Camp 14’ 즉 ‘14호 수용소 탈출’의 저자 블레인 하든(Blaine Harde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블레인 하든: He was raised by the guards to follow the camp rules… and then, they were killed in front of him.
신동혁은 수용소에서 태어나 오직 수용소에 대한 충성 만을 배웠고, 부모나 형제에 대한 사랑을 몰랐습니다. 어머니와 형이 처형당하는 걸 보고 죄책감이 없었습니다.
<<죄수들에게 가족의 개념 혹은 사랑이나 윤리의식과 같은 기본적인 감정이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오직 ‘배고픔’이라는 본능만 있었다. 등에 지고 나르던 재봉틀 받침을 떨어뜨린 벌로 간수가 자신의 손가락을 잘랐지만 공개처형 당하거나 팔이나 다리가 잘리지 않아 오히려 간수에게 고마워 한 완전통제구역에서 태어난 죄수. >>
그러나 그는 수용소 바깥에는 평양도 있고, 국경 너머 러시아나 중국 등 ‘돼지고기, 소고기, 닭고기, 쌀밥 등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세상’이 있다는 충격적인 말을 전한 평양 엘리트 출신 수감자 박영철과 함께 2005년 1월 수용소 탈출을 감행합니다.
신동혁 증언-내일 당장 총에 맞아 죽든지 공개처형으로 죽든지 전혀 상관없었죠. 다만 총에 맞아 죽더라도 오늘 밤, 오늘 저녁 단 한끼만이라도 배불리, 배터지게 먹는게 소원이라고 결심하고 탈출했기 때문에…
그의 증언이 사실이라는 증거가 있느냐는 유엔 북한인권 조사위원장의 조심스런 질문에 신 씨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신동혁 증언: 제가14살 때 족쇄에 묶였던 자국, 불에 탔던 내 몸의 자국, 갈고리에 끼웠던 자국, 철조망을 넘으면서 찟어졌던 자국이 제가 여러분에게 보여줄 수 있는 자국, 그게 전부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두움에서 가장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렉 스칼라튜: The theme of today’s conference is ‘the heart of darkness’. The North Korean camp system is truly the heart of darkness, the darkest places within a system of relentless control, surveillance, and punishment.
지난달 6일 '어둠의 심장부: 북한의 숨겨진 수용소(The Heart of Darkness: North Korea's Hidden Gulag)'를 개최한 워싱턴 DC 북한인권위원회의 그렉 스칼라튜 사무총장의 말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도이췰란드가 유대인을 말살하기 위해 자행한 600만 명의 유대인 대량 학살 ‘홀로코스트’를 잊지 않기 위해 설립된 미국 중서부 일리노이주 스코키의 ‘일리노이홀로코스트박물관 및 교육센터’에서 열린 북한 정치범수용소 철폐를 촉구하는 인권행사입니다.
신동혁 삶의 역정 ‘Escape from Camp 14’ 25개 언어로 번역; 다수 미국 초중고 대학생 교재 채택
UN 북한인권 조사위원회 설립에 결정적 기여
국제인권단체 유엔워치 ‘도덕용기상’ 수상
미국 CBS시사프로그램 ’60 Minutes’ 출연 등 북미대륙과 유럽언론 주목
도이췰란드 마크 비제 감독의 신동혁 기록영화 “14호 수용소: 완전통제구역” 인권상 수상>>
정치범수용소에서 태어나 수용소 철폐를 촉구하는 인권운동가로 변모한 신동혁 씨. 그도 이날 행사에서 홀로코스트를 직접 경험한 유대계 미국인과 한국인 등200여 명의 청중에게 호소했습니다.
신동혁: 여러분이 60년 전에 일어났던 나치 수용소 홀로코스트의 만행이 끔찍하고 이 만행이 정말로 일어났고 앞으로도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충분히 여러분의 머리속에 북한 정치범수용소를 해체할 수 있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그 자유라는 의미를 너무 잘 알고 있고, 그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한테 충분히 그걸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 씨는 강연이나 증언을 위해 유럽이나 미국 등지의 도시에 갈 때마다 홀로코스트박물관을 찾아가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한 방법을 찾으려 하지만 참 어렵다며 북한 인권개선에 동참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유대인 나치수용소에서 끔찍하게 고통당하다 죽은 사람과 북한 정치범수용소에서 고초를 당하다 죽은 사람의 모습이 너무나도 똑같고 홀로코스트는 ‘이미 지나간 불행한 역사’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라는 것입니다.
일리노이홀로코스트박물관 리차드 허샤우트(Richard Hirschhaut) 관장은 신동혁 씨가 60년 전이 아니라 오늘날 자행되는 잔혹한 인권유린이 개선될 것이라는 희망의 상징이라며, 나치의 대학살을 겪은 유대인이 ‘티쿤 올람,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라'는 유대인의 교리를 그와 함께 실천하라고 말했습니다.
허샤우트 관장: High concept that, in Jewish tradition, is known as, Tikun Olam, repairing the world…and yet, in Shin, there’s hope, inspiration, there’s sense of future and hope.
이날 청중으로 참석한 유대계 미국인은 리처드 배어(Richard Baehr) 씨는 많은 참석자들이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존재에 처음으로 눈을 뜨게 됐다며, 이젠 북한의 핵이나 미사일보다 인권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바에어 씨: I think the turnout was terrific by both the Jewish community and the Korean community and there’s every reason why both of them should work together against the terrible situation in North Korea, a massive HR violation on a large scale.
그가 죽음의 수용소를 탈출한 것은 인간 누구나가 태어나면서부터 유전자로 가지고 있는 자유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는 신동혁 씨. 그는 이날 박물관 부대표이자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랄프 레복(Ralph Rehbock) 씨와의 대화에서 받은 감동을 전했습니다.
신동혁: 자유라는 것은 사실 우리가 인류가 생겨날 때부터, 또 아기가 엄마의 뱃속에서 태어날 때부터 DNA로, 유전자로 가지고 태어난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독재자가 그 자유를 억압하려고 해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전자나 DNA를 없애지 못한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저와 같은 테이블에 앉으셨던 분이 13살 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잡혀 들어가셨지만 끝내 생존해서 나오셨습니다.
북한 김일성대학 출신 엘리트 탈북자 현인애 탈북지식인연대 부대표. 그는 박물관 전시물을 관람하며 2차대전 당시 국제사회가 무관심해 수 백만 유대인의 희생을 막지 못했고 그 끔찍한 역사가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서 되풀이 되고 있는 현실에 가슴이 미어졌다며 관심을 촉구했습니다.
현 부대표: 앞으로 여러분들이 북한인권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더 많이 목소리를 높여주면 거기에 있는 한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는데 이바지 할 것이라고 저는 믿어 마지 않습니다.
신동혁 씨는2006년 한국에 정착한 후에도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악몽을 벗어나지 못하고 정신병원 폐쇄병동에 입원하거나 약물치료를 받았습니다.
양아버지 로웰 다이 씨: Before, when you talk with him, he often did not make an eye contact with you. And he was often looking down and his conversations and his words were very short. And now he will carry a dialogue, he’s much more open, he smiles a lot more.
4년 전 그의 양아버지가 되어 그에게 가족의 의미를 알려준 미국인 로웰 다이(Lowell Dye)씨는 처음 만났을 때 신 씨가 땅만 쳐다보고 다른 사람과 눈을 않은 채 경계심을 나타냈다고 기억합니다.
다이 씨는 신 씨가 자유세계에서 받은 ‘사랑’과 ‘배려’로 훨씬 밝고 개방적인 성격으로 변했고 자주 웃고 삶을 즐기는 것 같아 기쁘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성을 말살하는 체제 하에서 태어났지만 자유세계의 도덕적 가치를 습득하고 그 귀중한 ‘자유’의 가치를 정치범수용소에도 전하려는 청년 신동혁. 그래서 그는 아시아, 북미대륙, 유럽 각지를 돌며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수용소의 참상을 알리고, 북한인권 실태를 전 세계에 고발하기 위해 Inside NK 인터넷 방송도 시작했습니다.
신동혁: 이런것들이 점점 활성화가 되고 퍼져 나가면 북한이 아무리 폭압적으로 억압하려고 해도, 언젠가는 북한 정권이 어떤 변화로 무너지던지… 독재의 역사는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북한이 운좋게 60년이 걸린 거지, 제 느낌으로는 북한의 역사의 끝도 거의 가까와지지 않았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외부세계의 정보가 유입되면서 북한 주민들이 잘못된 체제에 대한 자각을 하기 시작했다며 다가올 통일에 대한 염원을 내비쳤습니다.
지난 10월 23일 ‘14호 수용소 탈출’을 읽은 조지 W. 부시(George W. Bush) 전 미국 대통령의 초대로 텍사스 주 부시 전 대통령 기념관을 찾은 신동혁 씨. 그는 10년 후 쯤에는 통일이 되어 고향에 가서 농사지으며 정말 평범하게 살고 있기를 희망했습니다.
신동혁: 부시 대통령께서 저한테 “10년 후에 당신 모습은 어떤 모습이냐?”고 물어서 제가 대답했습니다.
정말 저의 솔직한 심정은 북한에 내가 태어났던 14호 수용소가 아닌 제 고향에 가서 사는 것이 꿈입니다. 자연도 그립고, 물도 그립고. 물론 같이 살 동안 제 동료들하고는 죄수로서의 관계 때문에 말도 잘 못하고, 싸우기는 많이 싸웠고, 서로 원치 않게 그런 나쁜 관계였지만 10년 후에 다시 갈 수 있다면 다시 가서 그들과 뭘 하든 재미있게 살고 싶은게 제 바램이죠.
세계인권선언의 날 65주년을 맞아 자유아시아방송이 보내드린 특집방송 ‘북한 정치범수용소 탈출한 신동혁, 자유를 외치다’를 마칩니다. 제작에 양희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