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 탈북 후 미국 서부 로스앤젤레스에 가정을 꾸린 탈북가정은 약 30가정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1997년도에 탈북해 이제 10년 넘게 미국에서 가정을 꾸리며 살고 있는 김창호씨를 유지승 기자가 만나봤습니다.
올 2015년은 을미년 양띠의 해 입니다.
김창호씨는 48세 양띠로 1997년 북한을 탈출해 중국으로 왔습니다. 1990년대 북한 주민들은 너무나 굶주린 상황이었고, 길바닥에도 굶어 죽어있는 시체가 있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어서 아내, 아들과 함께 탈북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김창호 탈북자: 길바닥에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상태고, 누구 하나 거두는 사람도 없는 상태였었고, 그런 상황에서 살 수도 없었고, 희망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저의 처와 함께 탈북해야겠다(라고 결심했습니다)
김창호씨는 중국에서 잠깐의 생활은 행복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북에 두고 온 다른 가족들이 생각나 아내는 다시 북한에 들어갔다가 붙잡혀 모진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이후 다시 아내는 탈북에 성공했지만 수용소 생활이 너무나 고달파 고생한 흔적이 역력했다고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탈북한 아내를 처음 만난 김창호씨는 아내의 야윈 모습에 눈을 의심하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고 합니다. 2007년 김창호씨 가족은 미국으로 건너왔습니다.
미국에 온 김창호씨는 닥치는 대로 일을 했고 열심히 일한 만큼 경제적으로 여유도 생기고 희망도 꿈꿀 수 있게 됐다고 합니다.
김창호: 여기 스왑 미트(중고품시장) 저기 스왑 미트를 보름 동안 돌아다니며 연구를 했고, 스왑 미트에 뛰어들어 옷장사, 마사지 등을 하게 됐습니다. 이제 소망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분식집을 자그맣게 시작해 배달도 하며 뛰어다니면서 뭔가를 이루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만두와 음식조리는 자신 있다는 김창호씨는 이제 자신의 이름을 내건 분식집을 차리고 싶다는 희망도 생겼습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 목숨을 건 탈북 과정을 거쳐 가족들에게 자유를 안겨준 김창호씨.
이제는 다 커 대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는 두 자녀들에게 자주 북한의 이야기를 해 준다고 합니다.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서 자유를 위해 미국으로 왔는지, 그리고 자녀들을 위해 얼마나 부모들이 노력하고 있는지 알려주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아이들이 열심히 공부해 좋은 대학교에 진학하는 꿈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다른 미국 가정의 부모들과 똑 같은 꿈이자 희망이지만, 탈북자 김창호씨는 이런 꿈을 꿀 수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김창호: 가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도 행복한 사람이구나'라고 느끼게 됩니다. 미국에 와서 우리 아이들 공부하는데 미국 정부에 감사합니다. 이런데 저희가 와서 우리 애들에게 공부를 시킬 수 있는 희망이 있어 너무너무 가슴이 벅찼습니다. 아이들에게 북한 이야기를 자주 이야기 해줍니다. '부모는 자식이 잘되라고 미국까지 데려와서 애쓴다. 미국에서 공부 열심히 해서 잘 된 대학을 나와야 되겠다' 이런 이야기들을 자주 해줍니다.
김창호씨는 북한에서도 띠를 따진다며 올해는 자신의 띠인 양띠해인 만큼 자신의 해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2015년 ‘김창호 분식집’의 시작을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