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8일은 미국에서 북한인권법이 제정된 지1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날을 맞아 RFA, 자유아시아방송은 미국에 정착한 탈북자들의 삶을 조명하고, 북한인권법이 걸어온 자취와 북한인권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식 변화 등을 조망해보는 기획 기사를 2차례 거쳐 방송하게 됩니다.
오늘 첫 순서로 "아메리칸 드림 일구는 탈북자들"편을 보내드립니다.
보도에 정영기자입니다.
2004년 10월 18일, 중국과 한국 등 세계 도처에 사는 탈북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 커다란 '사건'이 미국에서 일어났습니다.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이 하원과 상원을 거쳐 통과된 북한인권법안에 서명하면서 미국에서 북한인권법이 세계 최초로 탄생하게 된 겁니다. 이 법은 북한 주민의 인권 신장과 북한주민에 대한 인도적 지원, 그리고 탈북자의 난민 지위 인정과 국제사회의 지원권고가 주요 내용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로써 탈북자들이 난민 자격으로 미국에 입국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됐습니다. 2006년 5월 6명의 탈북자들이 최초로 미국에 입국하면서, 미국정부는 이 법의 실효성을 입증했습니다. 이 법이 채택된 이후 지난 10년 동안 미국에는 171명의 탈북자가 입국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북한에서 미국을 '철전지 원수'라고 교육받았던 탈북자들이 보는 미국사회는 과연 어땠을까, 미국에 정착한 탈북자들은 미국에 도착하던 순간을 이렇게 터놓았습니다.
50대 탈북 여성: 비행장에 내려서 보니까, 참. 잔잔한 거예요. 집들도 낮은 집이고 숲이 우거지고 종달새 우짖고……이거 입이 다물어 지지 않는 거예요. 여기가 도대체 어디야, 와 상상이 안되더라고요.
30대 탈북 여성: 벅찼지요. 되게 예쁘고 아름답고 이런 나라구나. 동물의 왕국에 온 느낌, 너무 평화로운 느낌…… 행복감으로 너무 벅찼지요.
50대 탈북 남성: 공항에 척 내리니 잡혀갈 걱정이 없잖아요. 그런 게 없어서 좋았지요.
2006년 처음으로 미국에 '난민 1호'로 입국한 데보라 최 여성은 무엇보다 미국이 안전하다는 안도감에 좋았다고 당시 감격을 이렇게 피력했습니다.
데보라 최: 북한에서 텔레비에서 볼 때는 거지들이 많고 깡패들이 많은 줄 알았는데 제가 내린 공항에는5월이니까 꽃들이 많이 피고, 그랬어요. 행복감과 두려움 절반 그랬어요. 왜냐면 하나도 모르는 나라에 떨어졌으니까, 어떻게 살까, 그냥 빈 주먹만 가지고 왔으니까, 두려움 절반 행복감 절반 그랬지요.
자유에 대한 기쁨도 잠시, 그 자유를 실현하기 위한 현실적인 문제들에 부닥치게 되자, 데보라 씨는 주경야독으로 공부했다고 말합니다.
데보라 최: ABC부터 다시 시작했어요. 랭귀지 스쿨(어학원)부터 시작해서 저는 일하는 것보다 공부하는 게 더 중요했거든요. 그래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커뮤니티 칼리지(2년제 전문대학)에서 공부하고 그러면서2년만에 고등중학교 시험 봤지요. 그리고 합격하고….
2년 동안 악착스레 공부한 결과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대학에 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춘 데보라 씨는 현재 미국 대학 간호사 공부과정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영어를 잘 배우고, 중국에 있을 때 습득한 중국어 실력을 살려 앞으로 미국과 중국을 연결하는 의료 사업도 꿈꾸고 있다는 데보라 씨. 앞으로 통일이 되면 북한에서 할 수 있는 일도 많을 거라는 꿈에 부풀어 있습니다.
2008년 두 딸과 함께 미국에 입국한 탈북 여성 한송화씨도 미국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이뤄가는 주부 중 한 사람입니다.
한송화: 이 땅의 문화를 모르고 처음 왔기 때문에 어려웠지요. 제일 어려웠던 것이 언어가 안되니까, 소통이 안되고, 차가 없으니까 마트(식품상점)에 식품 사러 가도 잠깐 갔다 올 거리를 하루 동안 걸리더라고요. 왜냐면 버스를 30분~1시간씩 기다려야 하니까요.
그래서 50대 초반에 자동차 운전을 배우기 시작한 한씨는 현재 운전면허증을 취득하고 미국의 넓은 도로와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한송화: 저 미국 할머니보다 나는 엄청 젊은데, 나는 못한다는 게 말이 돼? 그래서 해보자, 그렇게 결심이 생겨서 조금씩 배우기 시작해서 이제는 미국사람들처럼 운전하면서 쏜살같이 다닙니다.
함경북도에서 살던 당시 한밤중에 심한 통증을 느껴 병원으로 가야 했지만, 구급차가 없어 리어카에 실려 광산병원으로 가야 했던 북한 생활을 떠올리면서, 한씨는 "지금은 두 딸 모두가 승용차를 보유해 그야말로 북한 노동당 간부 못지 않는 삶을 누리고 있다"고 만족해 했습니다.
올해 7월 31일 가장 최근에 미국 동부 메릴랜드주에 정착한 4명의 탈북 가족도 미국에서 부자의 꿈을 이뤄가고 있습니다. 이들 가족은 현재 푸드 마켓, 즉 식품상점에서 일하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50대 탈북자 김씨: 미국에 오니까, 지금은 뭐 아무 곳에 가서 일해도 월급을 받을 수 있고, 중국에서야 일하고도 돈 달라고 하면 고발하겠다고 해서 돈 받기가 힘들었거든요. 그런데 그런 게 없으니까, 좋지요.
김씨는10대의 두 아들을 공부시키겠다는 목적이 미국으로 오게 된 기본 이유라며, 자녀들에게 그 동안 중국에서 배우지 못한 학업의 뜻을 이루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언어장벽을 넘고, 하루에 2~3개 직업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는 탈북자들에게 어려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새로 온 김씨 가족도 미국에 입국한 지 3개월이 되어 오지만, 자녀의 학교 문제 때문에 고민이 많다고 전했습니다.
또 버지니아 주에 거주하고 있는 40대의 탈북 남성도 구직 신청서를 여러 곳에 내보았지만, 고등학교 졸업증이 없다는 이유로 빈번히 퇴짜를 맞고 있습니다.
미국 내 탈북자들을 돕기 위해 조직된 재미탈북민연대(NKinUSA) 대표 조진혜씨는 "10대 20대의 탈북자들은 공부나 사회적응에 비교적 빠른 편이지만, 연세가 있는 40대 50대 분들은 취업 등에서 상당한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조진혜: 처음 미국에 오면 8개월 동안 푸드 스팸프(식품제공권)나 현금 조금, 그리고 의료 지원을 조금 받는데요, 감사하지만, 좀 부족하지 않나 싶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전혀 맨주먹으로 이 땅에 와서 직업을 어떻게 구하는지, 은행을 어떻게 여는지 서류는 어떻게 하는지 모르고 시작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미국에 왔을 때 한국처럼 하나원이 있어서 이 사람들에게 이 나라에 대해 가르쳐주고 인도해주는 지팡이 같은 분들이 있어서 정착하는 데 부족한 2%를 채워준다면 더 잘 정착할 수 있을 것 같고요.
조진혜씨는 민간 차원에서 하나원과 같은 정착시설을 만든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겠지만, 앞으로 북한난민들의 사회정착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시설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미국 탈북자에 대한 지원을 단순한 지원을 넘어 미래 한반도 통일을 위한 투자로 이해해달라는 의견도 전했습니다.
조진혜: 저는 탈북자들에게 투자를 해달라고 부탁하고 싶습니다. 그냥 불쌍해서 도와줘야 한다고 해서 도와주는 존재가 아니라 북한이 열렸을 때 미국에 대한 문화, 역사에 대해 일깨워줄 수 있는 사람들이고, 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한국이나 미국에 대한 좋은 점을 북한 사람들에게 알려서 전쟁 중에 사람을 죽이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북한은 전 주민이 무기나 같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의 사상을 바꾸는 것이 탈북자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미래를 보고 탈북자들에게 투자해준다면, 아마 세계적인 평화를 가져오는데 이로울 거라고 생각됩니다.
미국 북한인권법안이 발표된 지 10년이 되어 오지만, 그동안 미국에 입국한 탈북자가 너무 적다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미국에 정착한 탈북자들은 미국 북한인권법이 제정되면서 오늘의 자신들이 있음에 감사하면서 앞으로도 미국 정부가 북한인권 개선을 위한 역량 강화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해줄 것을 주문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