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총련 북송 50주년…“그곳은 지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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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 조총련의 대규모 북송조치로 재일동포들이 북한에 들어간 지 올해로 50년이 되는 해입니다. ‘인간의 이상사회’로 알았던 북한은 한 번 갔다 영원히 나올 수 없는 지옥이었다고 북송교포 출신 탈북자들은 말합니다.

정영기자가 보도합니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59년 12월 14일. 일본 니가타 항에는 일본경찰 2천명이 둘러싼 가운데, 3천명의 환송인파가 북한으로 떠나는 귀국자들을 바래주었습니다.

항구에서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 손에 손에 공화국기(인공기)를 둔 975명이 탄 2척의 여객선은 바다 건너 ‘사회주의 지상낙원’으로 향했습니다. 이때부터 근 25년 동안 북한에 북송된 재일동포는 약 9만여 명에 달했습니다.

북한 노동신문과 방송들은 이 모습을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에로의 민족의 대이동’ 이라고 떠들썩하게 선전했습니다.

특히 재일동포들의 귀를 솔깃하게 만든 것은 북한의 무료교육과 무상치료제였습니다. 조총련 간부들은 동포들에게 “이국에서 천대받는 것보다 조국에 가면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고, 사회주의 혜택도 입을 수 있다”고 선전했습니다.

그러나 북한에 첫 발을 들여놓는 순간, 재일동포들은 큰 실망과 좌절을 맞았습니다. 일본에서 보지 못했던 비포장도로와 낙후한 사회문화시설, 교육환경을 보고 속았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때가 늦은 것이었습니다. 당시 14살에 아버지를 따라 북한에 들어갔던 귀국자 출신 탈북자 김윤 씨도 그들 중 한사람이었습니다.


“그때도 어쨌든 제나라고, 살기 좋고 다 무료교육이고 무상치료이고 사회주의시책이 좋다고 알고 저를 데리고 갔거든요. 그런데 청진항에 내려서 놀랐거든요. 차마 이 지경인줄 몰랐다”

조총련 간부였던 아버지조차도 북한이 이렇게 낙후할 줄은 몰랐다고 김씨는 회고합니다.

그래서 항구에 들어서자마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났지만, 북한당국은 다시 일본으로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자신들의 체제선전이 거짓이라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청진, 신의주, 함흥 등 각지로 분산 거주된 귀국자들은 끼리끼리 모여 노동당 청사나 인민위원회에 찾아가 다시 일본으로 보내달라고 집단행동을 벌였습니다.

당시 이렇게 체제를 비난했던 재일 동포들은 대부분 간첩이나 반동으로 몰려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북한의 악명 높은 요덕수용소의 첫 수감자도 자기 친구네 가족이었다고 김 씨는 말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처럼 시위의 자유가 있을 줄 알았던 북한은 철저한 독재국가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귀국자들 속에서는 각자 북한을 탈출하기 위한 개별적 행동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재일동포 2세 출신의 탈북자 김선희(가명) 씨는 자신의 아버지는 19살에 북송되어 북한의 현실을 보고 도망칠 작전을 세웠다고 말합니다.


“당연히 후회했지요. 그때 아버지는 오셔서 친구들을 모아놓고 지도를 갖다 놓고 연안, 배천 이쪽 38선을 넘어서 다시 또 일본으로 갈려고 했대요. 그리고 작전을 짜고 가다 잡히면 우리 다 죽자, 칼로 배를 가르고 할복하고 죽자고 토의를 했대요. 그런데 친구 하나가 가다가 잡히면 또 가겠다, 왜 죽기는 죽겠는가 하면서 혼자 가다가 잡혀가지고 다 불었대요. 그 친구는 정치범 수용소에 잡혀가고, 아버지는 ‘금방 일본에서 와서 뭘 몰랐다’ 그래서 풀려났대요”

북한이 재일동포 북송사업을 진행한 것은 두 가지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는 조총련계 자금줄을 확보하기 위해 가족 친척들을 북한에 붙들어 두기 위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남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재일동포들을 대폭 수용함으로써 사회주의 우월성을 선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재일동포들의 정치적 활동을 약화시키고, 기초생활비로 살아가는 재일조선인 취약계층을 줄이려는 일본 정부의 승인도 한몫했습니다.

이렇게 북한에 들어간 북송 재일동포들은 사회적응 과정에서 많은 좌절을 겪었습니다. 자유의식과 자유행동에 익숙해진 귀국자들은 북한의 집단주의 생활에 쉽게 녹아들 지 못했고 주민들간 경제적 차이로부터 ‘재포’ ‘째끼’라는 비속어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사회에 정착하지 못한 북송동포들은 완전히 일본의 가족 친척들이 보내주는 돈으로 살면서 여러 가지 부작용도 낳았습니다.

심지어 북한은 북송교포들의 근로의욕이 떨어진다고 일본의 친척들에게 송금 액수나 송금 차수를 줄이라고 종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극심한 차별을 받아오던 귀국자들 가운데는 식량난 시기에 아사자도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북한 당국의 차별과 경제난을 피해 탈북한 북송교포는 일본과 한국 등에 수백 명이 살고 있습니다.

떠날 때 쉽게 떠났던 일본, 이들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는 길은 험한 가시덤불과 총칼이 가로막는 생사운명의 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