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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류우익 통일부 장관은 20일 국회 국정감사에 출석해 “신숙자 씨 문제는 통일부의 중요 관심사 중 하나”라고 말했습니다. 이 발언은 “신 씨가 아직 살아 있으며, 최근 평양 인근의 통제구역에 거주하고 있다”는 내용이 보도된 데 이어서 나왔습니다.
서울에서 박성우 기자가 보도합니다.
북한에 26년째 억류된 한국 시민 신숙자 씨와 두 딸의 문제가 20일 남한 언론에 크게 보도된 데 이어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제기됐습니다.
신 씨 모녀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고 이들을 한국으로 송환할 방안을 통일부가 검토하고 있느냐는 질문이 나온 겁니다.
류우익 장관의 답변은 원칙론에 입각했지만, 긍정적입니다.
류우익
: ‘통영의 딸’ 신숙자 모녀 건은 통일부의 중요한 관심사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밝히진 않습니다.
류우익
: 그러나 통일부가 그것을 위해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밝히는 것은, 현재 그 사람을 우리가 직접 보호하고 있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신변의 안전이나 여러 가지 점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제가 말씀드리지 못하는 점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경상남도 통영 출신인 신숙자 씨는 1985년 독일에 거주하던 중 북한의 권유로 월북했다가 탈출한 오길남 씨의 부인입니다.
오 씨는 우여곡절 끝에 1986년 북한을 탈출해 현재 서울에 살고 있지만, 신 씨와 두 딸은 요덕 정치범 수용소에 있다가 최근 평양 인근의 통제구역으로 옮겨진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한국의 일간지 조선일보는 20일 ‘신 씨 모녀가 요덕 수용소를 나와 현재 평양 순안공항 부근의 통제구역에 거주하고 있는 걸로 알려졌다’고 보도했습니다. 북한 당국은 신 씨 외에도 납북자 20여명을 같은 곳으로 강제 이주시킨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이 신문에 관련 정보를 제공한 최성용 납북자가족모임 대표입니다.
최성용
: (평양) 순안 비행장 옆에 ‘원화리’라는 곳이 있다고 합니다. 이곳으로 우리 납북자들을 집단 이주시켜서 관리한다는 내용의 정보가 저에게 들어왔고요. 신숙자 씨 모녀도 그쪽으로 이주했다고 제가 들었습니다.
최성용 씨는 신 씨 모녀가 정확히 언제 평양 부근으로 왔는지는 모른다면서도 “아마 최근에 옮겨진 듯하다”고 말합니다.
최 씨는 또 “신숙자 씨가 수용소에 있을 때 보다는 생활이 낫지 않겠느냐”고 추정하면서, “요즘엔 병원에서 치료도 받고 있다고 들었다”고 말합니다. 북한은 신숙자 씨 모녀 문제가 한국과 국제사회의 관심을 받게 되자 이들에 대한 처우를 개선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최 대표는 설명합니다.
최성용
: 거기에서 가까운 중앙당 병원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아무래도 그분들(신 씨 모녀)이 국제적으로 지금 문제가 되니까, 치료도 좀 해줘야 하고 하니까, 그렇게 하는 것 같습니다.
신 씨의 고향인 통영에서는 올해 초부터 “통영의 딸, 신숙자 모녀를 구출하자”는 운동이 펼쳐졌고, 이를 한국 언론이 보도하면서 국내외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날 ‘신 씨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접한 오길남 씨는 아내와 두 딸에게 “살아만 있어 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미안하다”고 말합니다.
오길남
: ‘어떻게든 살아서, 같이 만나자, 같이 안고 울어보자’는 이야기만 하고 싶고요. 너무... 저의 집사람에게는 ‘살아있어 달라’는 것도 너무 잔인한 요청입니다. 잔인하잖아요. 생활 자체가 잔인한데. 얼마나 힘듭니까. 삶 자체가... 그런 곳에서 그런 삶을 살아달라고 요청하는 게 너무 잔인한 요구인 것 같아요.
“치매 초기 증상을 앓고 있다”는 오 씨는 이날 신문을 통해 접한 소식이 ‘너무나 반갑다’면서도, 이에 덧붙여 자신과 북에 있는 가족을 위해 한국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을 적극 이행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오길남
: 오늘 온 건 흉보가 아닌 낭보임에는 틀림없지만, (정부가) 더 확인해 달라는 겁니다. 공식적인 확인이 필요하죠. 생사 여부와 소재를 확인해 주면 고맙겠다는 것이고요. 그 다음으로 두 번째는, 가능하면 송환을 위한 노력을 좀 해 주면 좋겠다는 겁니다.
오길남 씨는 1970년 독일로 유학 가 박사 학위를 받은 경제학자입니다. 1972년 독일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신숙자 씨와 결혼했고, 혜원과 규원 두 딸을 갖게 됩니다.
오 씨는 1985년 월북 권유를 받게 되고, “아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해 12월 가족과 함께 북에 들어가 ‘구국의 소리’ 대남방송 요원으로 일하게 됩니다.
오 씨는 1986년 11월 유럽의 남한 유학생 2명을 북으로 데려오라는 지령을 받고 덴마크로 갔다가 코펜하겐 공항에서 탈출합니다. 그 후 독일에서 가족 송환 운동을 펼치다 실패하자 1992년 5월 자수해 한국에 정착했습니다.